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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김윤한의 ‘추억 산책’ 흑백텔레비전 - 혹여 국민학교 교과서에 텔레비전이 소개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기사등록 2010-09-07 21: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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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 무렵인 1960년대에는 시골에서는 텔레비전이라는 이름도 잘 몰랐을 때였다.
 
'혹여 국민학교 교과서에 텔레비전이 소개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국민학교 적 선생님으로부터 텔레비전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텔레비전 최초 방송이 1956년에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나중에 본격적인 방송은 1960년대였고 우리가 사는 시골 마을에서는 1970년대쯤 되어야 텔레비전이라는 실물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시골 마을에 텔레비전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자 그것은 바로 온 면민이 놀랄 만한 뉴스거리로 등장했다. 어떻게 조그만 상자 안에서 사람이 들어가 말을 하고 노래를 하는지 참으로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움직이는 영상을 본 것은 늦봄부터 초가을 사이에 가설극장이라는 이동식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전부였고 영화의 원리는 학교에서 그런대로 배웠던 터였지만 작은 텔레비전 상자 안에서 병아리만한 사람들이 말을 하고 뉴스를 하는 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 당시 나는 어릴 적 생각으로 이제 영화의 시대는 끝났다는 생각을 했었다. 영화를 위해 일부러 천막을 치지 않아도 되었고 발전기를 돌릴 필요도 없었고 스위치만 넣으면 화면을 볼 수 있는 텔레비전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때의 텔레비전은 진공관 식이어서 전기 스위치를 넣으면 예열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가운데부터 빛이 나와서 점점 커지면서 비로소 화면이 보이기는 했다.

'텔레비전의 보급'

우리가 사는 마을에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300여 호 가까운 마을에서 텔레비전을 가진 집은 몇 년까지 한 집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과 달리 텔레비전은 낮 시간에는 일요일만 방송하고 평일에는 저녁 6시경이 되어서야 시작하는 까닭에 저녁이면 그 집에는 마을에 사는 많은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그 덕분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 아이는 위세가 대단했다. 학교에서 행여 그 아이와 다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을에서 한 대 밖에 없는 그 집에 텔레비전을 보러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그 집을 포함해서 텔레비전을 나중에 산 집들 중에는 텔레비전을 보는 대가로 돈을 받을 수는 없으니까 만화책을 몇 권 구해 놓고서는 만화를 보는 대가로 20원씩인가를 내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었다.

텔레비전이 워낙 귀했기 때문에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로 쌀 몇 가마니를 팔아야 텔레비전을 살 수가 있었다. 그래서 비싼 텔레비전은 가보 이상으로 귀하게 보관했다.

심지어 어느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훔쳐 갈까봐 기둥에다 자물쇠를 채워 놓기도 했었고 한다.

어느 집에서 텔레비전을 샀다고 하면 그게 큰 뉴스거리였다. 그 때부터 텔레비전이 있는 집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당당해 보였고 텔레비전이 많이 보급될 때에는 텔레비전이 없는 집 아이들은 소외감을 느끼곤 했다.

지금 기억으로 가장 처음으로 본 텔레비전의 제조사는 대한전선이라는 회사였다. 텔레비전에는 네 개의 발이 기다랗게 달려 있었고 텔레비전의 바깥에는 장롱처럼 나무 장식이 되어 있었다.

화면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로 된 미닫이를 좌우로 열면 화면이 보이곤 했다. 나중에 텔레비전이 못쓰게 될 때에도 알맹이는 버리고 껍데기는 물건을 보관하는 상자로 쓰기도 했었다.

1970년대는 시골에도 본격적으로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된 시기였다. 누구누구 집 아들이 객지에 가서 돈 벌어 텔레비전을 사 왔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효자로 통했다. 기억으로 1970년대 말까지도 텔레비전이 없는 집이 많았다.

'아련한 흑백의 추억'

우리 마을에 사는 누나뻘 되는 여자 아이가 모처럼 서울에 다녀왔다. 그리고는 이웃집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에이 이 연속극은 벌써 보름 전에 서울서 다 봤는데 뭐”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말에 우리는 서울서 예까지 오려면 그쯤 걸릴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참 웃기는 일이지만. 그 무렵 아마도 가장 인기 있는 방송은 드라마 ‘여로’였던 것 같다. ‘새엄마’라는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여로’만큼은 못했다.

친정 살림이 어려워 바보 영구에게 시집가서 겪게 되는 힘들고 서글픈 이야기를 어려운 시대상과 함께 그려낸 드라마였는데 어떤 때는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더랬다.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코미디 프로였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것이 대표적 프로그램이었는데 “왔뚜루루 왔뚜루루”하는 시그널 음악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배삼룡이며 이기동이며 구봉서 같은 희극배우들을 보며 따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총을 쏘며 싸우는 전쟁 드라마를 좋아했는데 군인들의 전투를 주제로 한 ‘전우’라는 드라마는 아이들에게 또 얼마나 많은 인기가 있었는지. 비록 흑백이었지만 그 화려한 전투 신은 아이들에게 커다란 흥미 거리였다.

이웃집에 텔레비전을 보러 갔다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를 보고는 밤길에 집까지 무서워서 떨면서 갔던 기억도 있다.

일요일이면 변웅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유쾌한 청백전’이라는 오락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개가 연예인들이 출연진이었는데 공을 굴리거나 줄넘기를 하는 등 게임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게 무어 그리 재미있었는지. 그 때 나왔던 광고도 아이들의 입에서 노래처럼 많이 오르내렸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라는 음료수 광고, ‘눈표 냉장고’ 광고와 노래, 새우깡 광고 노래 같은 것은 아직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생생하다.

‘챔피언 스카웃’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살기가 참 어려웠던 때였으므로 권투를 통해 챔피언이 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은 많은 젊은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끌 수 있었던 때문이었는지 매주 권투 시합을 중계방송을 했다.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 세계 챔피언이 많이 나왔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때도 축구 중계는 큰 인기였다. 특히 외국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위성 중계할 때는 텔레비전 앞에 빽빽하게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곤 했다.

화면이 자주 끊기기도 했지만 워낙 먼 곳 지구 저쪽에서 위성으로 중계되는 까닭에 끊기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것 중 가장 큰 해프닝은 레슬링 선수 안토니오 이노키와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세기의 대결이라며 연일 홍보를 한 탓에 많은 국민들이 마음을 졸이며 생중계를 지켜보았지만 서로 제대로 한 판 붙지도 못하고 싱겁게 경기가 끝나고 말았던. 하기는 원래 불가능한 시합에 기대를 건 게 잘못이었겠지만.

'컬러에 밀려난 흑백'

흑백텔레비전이 있었던 시절에는 방송국에서도 무대장치나 분장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화면이 흑백인 까닭에 적당히 무대나 분장을 해도, 예를 들면 검은 피를 흘려도 사람들은 그것이 붉은 것으로 상상해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아마 1980년대 초반 쯤 어느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날 쯤 낯선 도시에서 전파서 쇼윈도우를 통해 소위 말하는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가수나 배우들의 얼굴에는 화장을 한 듯 붉은 색조가 번졌고 무대에서 쏘아대는 그 현란한 색깔의 무대와 조명의 불빛은 그 때까지 보았던 흑백텔레비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동안 안방의 주인 노릇을 하던 흑백텔레비전 영상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컬러텔레비전 시대와 함께 광고나 패션 등 모든 것이 급격하게 컬러풀하게 바뀌게 되었다.

앞으로는 입체 영상 텔레비전을 비롯해 화면에 있는 물체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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