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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07-21 10: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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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는 충청수영성 시굴조사를 통해 1872년 지방지도 등 고지도에 기록된 영보정 터의 유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영보정(永保亭)은 조선의 4대 문장가인 장유(張維)가 그 경치가 호중(湖中)에서 첫 손가락 꼽히는 곳(永保亭勝槪冠湖中)이라고 했을 만큼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시는 사적 제501호인 충청수영성의 동벽구간 일부와 영보정지에 대한 정비·중창(복원) 사업에 앞선 기초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지난 4월 13일부터 시굴조사를 실시해 영보정 터의 유구를 처음으로 확인하게 됐다.

지난 1990년에 지표조사를 실시한 바 있으나 잔존한 지상 건축물의 현황파악을 위해 지표를 파내어 지하에 매장되거나 폐기된 유구를 조사하는 시굴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호서읍지(湖西邑誌)에 근거해 부분적인 트렌치 조사를 실시한 결과 영보정지에 기단석이 발견되었으며 동-서 기단석렬간의 너비는 약 6m, 남-북으로는 약 8m 범위에 걸쳐 건물이 자리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또 영보정지 외에도 고지도에 영보정과 함께 그려진 능허각지도 확인됐으며, 능허각지는 영보정지와 같은 평면 ‘ㄱ'자형의 전체 기단위에 남-북 방향을 장축으로 평면 ’-‘자 형태의 건물이 자리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이번에 발견된 영보정은 연산군 11년(1504)에 수사로 부임한 이량(李良)에 의해 세워졌으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깎아내린 듯한 절벽위에 지어져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과 어울려 소담하고 아늑함으로 선비들의 극찬을 받아왔다.

영보정의 제(題)·영(詠)·기(記)를 쓴 인물은 70여명에 100편의 시문을 남겼으며, 조선시대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李?光)은 영보정을 제1의 승지로 꼽으면서 ‘자고제영심다(自古題詠甚多)’라 하여 제영이 많았음을 말하여 주고 있으며, 어떤 이는 제영이 너무 많아 다 읽을 수가 없다고도 하였다.

또 영보정은 해동지도(18세기 중엽), 광여도(19세기 전반), 지승(조선후기), 보령부지도(1872년)의 고지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번 조사를 통해 향후 영보정 중창(복원)사업에 필요한 학술적 기초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조사가 완료되면 조선시대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였던 충청수영성(사적 제501호)을 2018년까지 국비를 지원받아 성곽을 정비하고 허물어져 사라진 성내 영보정 등을 중창(복원)할 계획이다.

한편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후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될 때까지 운영되었으며, 그 규모가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 속진에 배속된 군선(軍船)은 142척, 수군(水軍)은 8,414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ㅇ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개요
- 지정종별 : 사적 제501호
- 지정종별 :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
-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 일대
- 문화재 구역 및 보호구역 면적 : 125,326㎡(271필지)
· 문화재구역 : 10,378㎡(46필지)
· 문화재보호구역 114,948㎡(271필지)
- 관리단체 : 충청남도 보령시(보령시장)

자료문의 문화공보담당관 문화예술담당(930-3226, 민병선 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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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광 기자 오세광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오세광 FM_TV 표준방송 충청 총국장 前 제이비에스 공주취재본부장, 제3회 전국지역신문협회 '자랑스런 기자상'수상,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前 월간 '의정과 인물사 중부 지사장 기자' , 前 백제신문사 취재본부장, 前 금강뉴스 편집부 차장, 제1회 '민족평화상'수상, 한국 누드 사진가 협회, 현 충청남도 지회장, 현 한국 보도 사진가 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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