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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선산지역, 청동기~조선시대 생활유구 및 유물 확인" - '청동기에서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에 이르는 '유구 및 유물' 인 것으로 확…
  • 기사등록 2008-07-04 11: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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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선산읍 교리 도시개발 사업부지내 문화유적 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수혈 주혈 구와 조선시대 가마2기, 근대 수혈 및 주혈등 시기불명의 우물과 자연형성구, 근대민묘등이 확인되는등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유구 및 생산유구가 확인되었다.조사대상지는 선산군 교리, 동부리, 화조리 일원으로 "교리유물산포지"로 명명된 지역내에 해당하며, 교리향교가 조사대상지와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또한 조사대상지 주변으로 생곡리 고분분, 지석묘군, 유물산포지 등 다수의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구미시는 경북 구미시 선산읍 교리, 동부리, 화조리 일대에 도시개발및 기반시설확보를 통한 주거단지조성을 위해 도시개발사업을 계획하고, 사업시행에 앞서 도시개발 사업부지내 문화재 존재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대경문화재연구원(사)에 지표조사를 의뢰. 2007년 2월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내역에서 다수의 토기편과 자기편. 기와편 등이 확인되었으며 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구미시는 사업부지내 문화유적의 존재 유무(有無)와 유적이 있을 경우 그 범위와 성격 그리고 유물의 내용 등을 밝혀 '도시개발사업' 으로 인한 '문화유적의 파괴' 를 막고, '문화재 보존및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 하기위한 시굴조사를 2007년 10월 대경문화재연구원(사)에 시굴조사 의뢰를 하였으며 문화재청으로부터 허가 제2007-0808호(2007년 11월27일)를 받아 2008년 5월3일 완료하게되었다.

구미시 선산읍 교리, 동부리, 화조리 일원을 조사결과 "교리"에서는 165개의 트렌치 설치중 26개의 트렌치에서 유구및 유물이 확인되었다, 유구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원형주거지,주혈,구 이며,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가마2기,수혈,다수의주혈" 등으로 수습된 유물로는 "무문토기편,유구석부,마제석촉,고배,대부완,자기편,기와" 등이며 이는 '청동기에서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에 이르는 '유구 및 유물' 인 것으로 확인 되었다"동부리" 에서는 106개의 트렌치를 설치한 결과 이중 2개의 트렌치에서 "수혈 및 주혈,소토" 가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 지표에서 유물이 확인되기는 하나 교리지역에서 쓸려내려온 유물이거나 복토시 쓸려들어온 유물인 것으로 추정, 동부리는 지형적으로 저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장기적인 침수로 인해 최하층은 흑색의 뻘층이 형성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조리" 는 105개 트렌치중 4개의 트렌치에서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확인된 유구는 "우물1기,자연형성구,근대민묘1기" 등이다. 이곳은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부분과 능선상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경작지는 소천에 의한 범람으로 해서 하상퇴적이 이루어지거나 복토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구미지역은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자료에의하면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학계의 보고로 알려졌다.

보고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임수동 '지석묘' 인의동의 '임동 입석' 과 구평동에서 칠곡, 천평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지석묘' 등이 분포되어 있다(영남대학교문화재연구원 2002년). 삼국시대의 대단위 고분군으로 대표적인 고분군은 '황산동 고분군'과 '낙산리 고분군'이 있다.

황산리 고분군은 '100여기 정도의 대형봉토분' 이 있으며, 주변에 봉토가 유실된 '소형분' 이 분포되어 있다. 1962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된 고분에서는 '금동제 장신구, 철제무기, 토기'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1999년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2기의 대형봉토분'과 '목곽묘 및 석곽묘 100여기'가 조사되었는데, 여기에서 '장경호, 고배, 기대' 가 함께 출토되었다.(대구대학교 박물관) 2002년 영남문화재연구원도 황산동 382번지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석곽묘 1기와 건물지' 등을 확인하였다.

(영남문화재연구원) 낙산리 고분군은 1917년 일본인 금서 용(今西 龍)가 분포조사와 함께 '28호 횡혈식석실분' 을 발굴조사하였으며, 모두' 200여기' 가 넘는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접해 있다.

(효성여자대하교박물관 1989,선산 낙산동 고분군)이와함께 인의동과 진평동 일대에서'6~7세기시대의 횡혈식석실묘'가 발굴 조사되었으며, (대구대학교중앙박물관). 천생산성 동쪽기슭에도 '100여기가 넘는 소형식석실묘'가 발굴 조사되었으며,(대구대학교박물관 1993년 선산 천생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선산읍 습례리, 북산리 그리고 옥성면 덕촌리에서도 '석곽묘' 와 '삼국시대 주거지' 등이 확인된 적이 있다.


그리고 구미시 옥계1동 옥계마을 북쪽 능선의 남사면 일대에도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를 통해 '100여기 이상의 수혈식석곽묘'가 분포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대구대학교박물관,구미국가산업단지등) 2002년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한 봉산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석곽묘4기', '삼국시대 수혈구 1기' 를 비롯한 '조선시대 생활유구' 들과 함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 같은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한 해평 월곡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토광묘 2기' 를 비롯하여 '삼국시대 석실묘 2기' 와 '단도마연토기, 석촉, 석검, 삼국시대 토도류, 옥석류' 등 많은 수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선산은 본래 일선군(一善郡)으로 삼국시대에 신라에 편입되면서 불리었으며, 신라 진평왕36년(614) 사벌주(沙伐州)를 폐(廢)하여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고 군주를 두었다가, 신문왕(神文王)7년(687) 일선주(州)를 폐하고 사벌주를 설치, 다시 일선군(郡)으로 고쳐 불렀다, 경덕왕16년(757) 숭선군(崇善郡)으로 다시개칭되었다가, 고려 성종14년(995) 선주(善州)라 하였으며, 현종9년(1018)에 상주목(尙州牧)에 예속(隸屬), 인종21년(1143) 일선현으로 하였다가 다시 지선주사(知善州事)로 승격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 선산군으로 되었다가 태종15년(1415)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선산군은 별군호(別郡號)로 화의군(和義郡)이라 칭하였다.

후백제와 고려가 각축을 벌이던 907년 후백제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에는 경상도 북부지역 진출의 발판이 되기도 하였으나, 936년 선산읍 동쪽 일리천에서 후백제와 고려가 최후의 결전을 벌여 이곳에서 승리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현대에는 6.25사변 낙동강 전투의 격변지로 구미시내 낙동강일원의 선산지역은 한국 역사의 전환지 이기도 하다.

대경문화재연구원(사)은 이번 시굴조사에서,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생활유구 및 생산유구가 확인된 2개 구역(교리,화조리)에 대하여는 도시개발사업이 이루어질 경우, 매장문화재의 보호와 학술자료의 확보를 위해 문화재보호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조사단의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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