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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김윤한의 추억 산책 '신기한 팽이' - 팽이 하나에 얽힌 그 아련한 추억들은 모든 것이 풍요한 이 시대 사람들이 …
  • 기사등록 2010-09-16 23: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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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처음으로 팽이와 만났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기 오래 전 아주 어릴 적이 아니었던가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팽이란 이름은 ‘팽팽’돌아간다고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아주 어렴풋한 기억을 되새겨 보면 바닥에 닿는 면이 뾰족한 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팽이가 그렇게 넘어지지 않고 돌아가느냐 하는 신기함에 놀랐던 것 같다. 더욱이 팽이채로 때릴수록 더 힘차게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구심력이니 원심력이니 관성의 법칙이니 그런 것들을 전혀 모르던, 모든 지식이 하나도 없던 백지처럼 깨끗한 때였으니까 그런 신기함은 지금 생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지름과 높이가 각각 3~4센티미터와 5~6센티미터 쯤 되는 나무 팽이였다. 내가 자라던 곳은 면소재지여서 문구를 파는 가게도 몇 군데 있었던 탓에 아이들은 대개가 기계로 매끈하게 잘 깎여진 나무 팽이를 가지고 놀았다.

하도 어렵게 살던 때라 팽이를 살 돈도 없었던 아이들은 어른들이 나무를 잘라 모양을 깎아 만든 팽이들도 있었다. 그 팽이는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어서 아랫부분이 매끈하지가 않고 울퉁불퉁했던 까닭에 돌아갈 때도 삐뚤거리며 돌아가곤 했다.

그런 나무로 만든 팽이 이외에 양철로 만든 납작한 모양의 실팽이라는 것도 있었다.

팽이 윗부분에 실을 수차례 감은 다음 가운데 고정된 핀을 잡은 채 실을 힘차게 당기면 실팽이는 그 힘으로 힘차게 회전을 하며 돌았다. ‘왜-앵’하며 돌아가는 일종의 기계음도 그 당시로서는 꽤 신기한 소리였다.

팽이 깎던 아버지 60~70년대만 해도 시골에서는 돈을 접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까닭에 어른들을 졸라서 팽이 하나를 장만하는 일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나도 몇 번이나 아버지를 졸랐지만 팽이를 사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이었다. 아버지께서 마당에서 둥그런 소나무를 자르시는 거였다. 뭘 하시느냐고 여쭤도 대답도 않으시고 자른 나무토막을 낫으로 열심히 공들여 흡사 무처럼 끝이 뾰족하게 다듬으시는 거였다.

내가 팽이를 사 달라고 조를 때는 대꾸도 않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위해 팽이를 깎으시는 거였다.

소나무 굴피가 벗겨진 뽀얀 나무의 속살을 정성스레 다듬는 아버지의 그 진지한 표정이 아직도 뇌리에 가물가물 되살아나는 것 같다.

팽이를 다 깎으신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팽이의 뾰족한 끝부분에 망치로 끝이 동글동글하게 다듬어진 못을 박으셨다. 이로써 내게도 팽이 하나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는 팽이 윗부분에 누나가 쓰던 크레용으로 빨갛고 노랗고 파란 색깔을 칠했다. 윗부분에 칠한 색깔이 비록 삐뚤삐뚤했지만 그것은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팽이가 힘차게 돌아가면 색깔은 한데 섞이어 참으로 부드럽고도 상상하지 못했던 색깔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팽이와 항상 함께해야하는 것은 팽이채였다. 50센티미터 쯤 되는 나뭇가지 끝에 채가 움직이지 않게 동그랗게 홈을 파서는 그 자리에 헝겊을 길쭉하게 찢은 것을 묶었다. 그리고 헝겊은 가벼워서 팽이를 돌리는데 힘을 잘 받지 못해서 끝에 물을 묻히거나 침을 탁탁 축여서 팽이를 치곤했다.

그리고 팽이채로 사용하는 헝겊은 오래 치면 실밥이 너덜너덜해지면 안 되므로 떨어진 런닝구(런닝셔츠) 천을 기다랗게 하고 거기에다 질긴 닥나무 속껍질을 함께 섞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나만의 팽이가 완성되자 아버지가 깎은 팽이를 돌렸다. 팽이채로 힘껏 치자 팽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윗부분에 칠한 크레용 색깔들이 섞여서 묘한 색깔을 나타냈다.

하지만 가게에서 파는 팽이 보다는 표면이 매끄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돌아갈 때로 팽이라 흔들흔들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 몇 번 내 팽이를 치다가 결국은 창피해서 그 팽이를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훨씬 나중에야 결국 새 팽이를 사주셨다.

겨울방학 내내 함께 하던
겨울은 참으로 춥고 길었다. 대개 12월 24일경에 방학을 시작하면 1월 말까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갖고 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던 시절이어서 긴 방학기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언 논에서 썰매를 타서나 연날리기를 하거나 팽이를 치는 것 외에는 뚜렷한 놀 거리가 없던 때였으므로 팽이는 남자 아이들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필수적인 장난감이었다.

팽이는 보통 마른 흙땅에서도 잘 돌아가지만 시멘트 바닥이나 특히 얼음판에서는 더 기가 막히게 보드랍게 잘 돌았다. 그래서 겨울에는 주로 썰매타기와 함께 얼음판에서 팽이 돌리기를 주로 했다.

그냥 팽이채로 팽이를 돌리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동무들이랑 - 60~70년대에는 친구라 하지 않고 동무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동무라는 말이 사회주의적 호칭으로 쓰인 까닭에 동무를 친구라고 바꾸어 불렀던 것 같다 - 팽이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시합을 하는 재미가 더 있었다.

가장 흔하게 하는 놀이가 팽이싸움이었다. 팽이싸움은 둘이나 셋이서 팽이를 들리다가 팽이가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팽이채로 팽이를 힘껏 때려서 상대방 팽이와 부딪쳐 먼저 쓰러지는 팽이가 지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5미터나 10미터 바깥쪽에 금을 그어 놓고는 팽이를 치며 그 지점을 빨리 돌아오는 게임이었다. 빨리 돌아올 양으로 너무 세게 치면 팽이가 돌부리에 걸려 쓰러지거나 장애물에 걸려 쓰러지게 되므로 적당한 속도 조절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시합은 오래 돌리기였다. 일정 시간 팽이채로 팽이를 돌린 다음 가만히 놔둔 상태에서 누구 팽이가 쓰러지지 않고 더 오래 돌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합에서 지고이기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지만 어릴 적에는 그런 사소한 놀이를 하면서도 승부에 왜 그리 집착했었던지. 게임에서 지면 오기가 돋아 기어이 상대편을 이기려고 기를 썼다.

그런 면에서 팽이는 단순히 나무를 깎아 만든 장난감을 넘어 흡사 생명을 가진 것처럼 어린 우리들과 기쁨과 무료함을 함께 했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시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팽이가 얼마나 부드럽게 균형 있게 오래도록 쓰러지지 않고 서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팽이 끝에 박힌 딱딱한 쇠 부분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가게에서 새 팽이를 사더라도 더 부드럽게 잘 돌게 하기 위해서 작은 베어링(쇠구슬)을 구해다가 팽이 끝에 어렵게 박아 넣어 사용하곤 했다.

쇠구슬은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못이 박힌 팽이보다 넘어지지 않고 더 잘 돌았다. 겨울 방학 긴 기간 동안 팽이는 우리들의 필수 휴대품이요 또 다른 분신과 같았다.

쓰러지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돌아야
물론 요즘에도 팽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어릴 적처럼 모든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필수적인 장난감은 아니다. 하긴 철이 들고부터는 나무로 만든 팽이를 구경해 본 적이 없다.

그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어렵고 궁핍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사소한 자연이나 사물들도 지금보다는 훨씬 소중했다.

장난감이라고는 없던 시절 우리가 놀던 얼음판이며 연을 띄우던 바람이며 팽이가 되어 돌아가는 나무토막 하나도 우리에게는 모두 소중한 삶의 일부로 여겨졌던 때였다. 지금 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이었고 친자연적이었다.

또한 팽이를 통해서도 많은 세상 이치를 배우게 되었던 같다. 팽이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채로 팽이를 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팽이를 칠 때에도 너무 세게 때리면 쓰러지게 되므로 너무 세지도 않게 너무 약하지도 않게 적당한 힘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것은 팽이의 경우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사람도 발전할 수 없다. 결국은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팽이처럼 쉬지 않고 힘차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비록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작은 나무토막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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