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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07-26 11:4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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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군수 김충식)은 국가문화재 보물 제564호로 지정된 영산만년교가 230년이 지나 석재의 풍화부식 진행으로 원형이 변형되고 있어 해체보수가 불가피하여 888백만원(국비622백만원, 도비93백만원, 군비173백만원)의 사업비로 2009년 9월에 공사를 착공하여 2010년7월23일 준공 복원을 하게 되어 원래의 아름다운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보물 제564호인 만년교는 2003년8월에 실측조사를 한 결과 석재의 풍화부식 진행과 홍예석의 하부침하 등으로 변행 발생작용이 되고 있음을 알고 2005년4월 정밀안전진단용역을 시행한 결과 홍예교의 기초하부 세굴진행으로 홍예석 부재의 파손 및 훼손 발생으로 2차 변형 방지와 안전성 확보가 필요하다는 진단결과가 나옴에 따라 2007년도 문화재청의 사업승인과 함께 국도비가 지원되어 해체복원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국가보물로서 최대한 원형에 가까운 복원을 하기위해 문화재청의 3차례에 걸친 설계보완과 7명의 문화재전문가(손영식 선암사승선교자문위원, 윤홍로 문화재청 건축문화재위원, 장석하 경일대교수, 고영훈 경상대교수 등)로 기술지도위원회가 구성되어 2009.9월 공사를 착공 이후 2010.7월 준공까지 9차례에 걸쳐 공사현장에서 기술지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시공회사는 명성기업(주)이며 석공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제120호인 석장 이의상씨가 맡아 추진하는 등 원형복원을 위해 세심하게 추진되었다.

특히 군청 문화재담당자는 국가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해체하여 원형 복원하는 것은 “장기간의 사업기간과 많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조심스럽고 어려운 사업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업 전 만년교에 대한 역사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국립박물관과 전국 대학 및 기관 박물관 등을 방문하여 최대한 자료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번 만년교 해체복원사업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구조적인 변형이 심하여 전면 해체복원이 불가피한 상태에서 해체 해본 결과 다리측벽의 내부에는 적심이 없었고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과정에서 불안정하게 쌓아올린 강돌(川石)을 처음 축조당시의 부재를 기준으로 같은 강돌(川石)을 최대한 확보하여 사용하고 부족한 부재는 가공돌(加工石)로 교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 교체된 가공돌(加工石)에서 오는 이질감과 주변 경관의 변화로 인해 보수 전후의 모습이 조금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한편 국가보물인 영산만년교는 조선 정조4년(1780년)에 석수 백진기가 축조하였고 그 후 1892년 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만년교의 설치는 당시 나무다리가 큰물에 자주 떠내려가자 영산 백성들이 힘을 합해 돌로서 싸게 되었으며 그때 이를 본 영산에 사는 김윤관이란 사람이 일을 주선하고 석수 백진기가 다리를 축조하였다라고 되어있으며 만년교(萬年橋)라는 이름은 만년교를 세울 무렵 영산에 사는 신통력의 필력을 지닌 열세살의 신동이 살고 있었는데 다리가 완공되던 날 밤 그 소년의 꿈에 산신령이라는 노인이 나타나 내가 거닐 다리인데 다리를 만년교(萬年橋)라하고 너의 신필을 새겨 주고싶으니 쓰도록 말하고는 노인이 사라지자 소년은 그날 밤이 새기 전 돌에 만년교(萬年橋) 석자를 쓰 놓은 것이 지금 돌에 쓰여 있는 비의 글씨이다.

또한 만년교를 일명 영산현의 고을 원님이 다리를 고쳐 주었다하여 “원다리”로 불리기도 하며 영산관내에는 만년교외에도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영산석빙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영산쇠머리대기, 영산줄다리기와 도문화재인 영산고분군, 영산향교, 영산구계리석조여래좌상 등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연중 많은 문화재 탐방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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