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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2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안동 하계마을' - 전국 마을단위에서는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 배출...
  • 기사등록 2008-08-13 22: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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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종가를 지나 얼마를 가다보면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가 나온다. 하계마을에서 이 기적비를 제외하면 진성이씨 하계파 문중의 450년 역사를 더듬어 내기는 정말 어렵다. 더구나 이 쇠락한 마을에서 근대 민족 문제에 맞서 자신들을 불살랐던 독립운동가가 25명이나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이 기적비가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이다.
 
하계는 퇴계종가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퇴계(退溪) 손자,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의 후손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이영도를 계승한 진성이씨의 4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이 마을은 항일투쟁기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하계마을 독립운동기적비는 바로 이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4년 10월 7일 마을 옛터 언저리에 세워졌다.
 
하계마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향산 이만도(李晩燾)와 동은 이중언(李中彦)은 1895년 선성宣城(예안)의병에 나섰다. 이어 나라가 망하자 ‘단식’이라는 처절한 방법으로 잠시나마 나라의 녹을 먹었던 관리로서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들의 죽음 앞에 하계마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걸음걸음을 민족을 위해 내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영향으로 하계마을에서는 예안면과 도산면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동봉(李東鳳)·김락(金洛)·이비호(李丕鎬)ㆍ이기호(李琦鎬)ㆍ이용호(李用鎬)ㆍ이극호(李極鎬)ㆍ이호준(李鎬俊), 유림단의거(파리장서운동)를 주도한 이중업(李中業),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렸던 이동흠(李棟欽)과 이종흠(李棕欽),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원일(李源一),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자결한 이현구(李賢求) 등 20명이 넘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는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향산 이만도 일가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안동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예안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자정순국의 길을 걸은 향산 이만도에 이어 그의 아들 이중업은 독립청원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며느리 김락은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문으로 실명을 당한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손자 이동흠과 이종흠은 대한광복회와 제2차 유림단 의거를 주도하였다.

이처럼 빛나는 역사를 가진 하계마을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민족문제에 맞서 자신을 불사른 하계 사람들의 빛나는 행적도, 없어진 마을처럼 기억에서 지워져 갔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하계마을의 역사를 되살려 역사적 교훈으로 삼자는 뜻을 세움에 따라, 마을 옛터에 이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다.

사회주도층과 지식인들이 일제의 침탈에 대응하는 양상은 다양했다. 한 편에서는 목숨을 바쳐 순국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침략자의 앞잡이로 살아간 인물도 많았다. 하계마을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위치에서 역사적 책임을 물었다. 심지어는 목숨으로 책임을 물었다. 이것이 바로 배우고 가진 자의 역사적인 책임, 즉 진정한 Noblesse Oblige가 아닐까 ?

<제공: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강윤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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