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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08-06 00: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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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6.25 전쟁이 일어난 그 해 겨울, 윤혼 옹(당시 20세. 서울시 구로구 구로5동)은 국민방위군 입대를 위해 인솔자인 장교를 따라 동료들과 함께 후방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다.
 
제대로 먹고 자지도 못해 기진맥진하며 발을 질질 끌고 갔다. 정규 군인들도 보급을 제대로 못 받아, 먹지도 못할 판에 민간인 신분인 장정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피난을 가는 도중에도 청년 윤혼은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서울 방직공장(현 애경유지)에서 인연을 맺게 된 김철수 군(당시 25세)이 고향으로 가며 툭 던져 준 한 마디였다. “언제라도 상주를 들르게 되면 한 번 찾아 와. 내 고향 상주는 인심이 좋아”윤혼 청년 일행은 진주로 가는 도중, 상주에 도착했다.

춥고 배고픈 청년은 소대장으로부터 하루 말미를 얻어 김철수 군을 찾았다. 마침내 물어물어 김철수 군의 집에 당도하니 형 김희수 옹(작고. 당시 32세)이 맨발로 달려 나와 손을 덥석 잡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 자식을 반기는 것 같았어. 난 지금껏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나를 잡아주었던 그 따뜻한 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과거를 회상하는 윤혼 옹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김희수 옹은 일제 시대 와세다대를 나온 지식인으로 아내 김동순 님(작고)과 함께 이웃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이웃들이 기억한다.

아내는 부엌에 들어가 밥을 부랴부랴 지어 큰 그릇에 고봉으로 밥을 가득 담아 내 주었다. 두 그릇을 허겁지겁 먹고 난 청년은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온돌방이 절절 끓었다. 김희수 옹이 뭐라고 얘기를 하는데 청년 윤혼은 눈꺼풀을 뜰 수 없어 그대로 잠에 꼬꾸라졌다. 다음 날 아침 김 옹의 아내는 아이 머리만한 주먹밥 두 개를 싸, 겉에는 김을 두르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주었다. 청년은 목적지인 진주로 가는 도중에 주먹밥을 먹으면서 울었다.

그 후 윤혼 청년은 해병대 입대 후, 수많은 전투를 거치고 6.25 참전 용사로 제대했다. 윤혼 옹은 열심히 살았고 돈이 생기면 땅을 샀다. 그리고 당시의 배고픔을 기억하고 한 평도 팔지 않았다. 지금도 도심 한복판에서 영농을 하고 있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옛날 은인을 찾기로 했다. 마침 상주로 사진촬영을 가는 딸, 윤주심에게 꼬깃꼬깃 접은 종이조각을 내밀었다. ‘상주시 외답면 주막거리. 앞 동네 금광. 형 와세다대 김희수. 동생 김철수“ 등등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딸은 연꽃단지에서 만난 김인호 명실상주 단장에게 사람을 찾아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얘기가 안동 MBC 라디오 등 3개 방송국에서 리포터를 하고 있는 개인택시 기사 김상준(59세. 상주시 무양동) 님의 귀에 들어갔다. 마당발로 소문 난 리포터 였지만 60여 년 흘러간 세월을 잇기는 쉽지 않았다. 한 닷 새 지나 실마리가 잡혔다. 그리고 찾았다.

김옹은 돌아가시고 아들 김정배(60세, 상주시 서문동)님이 2일 서울에서 온 윤혼 옹과 아들 윤주이(50세. 한국농어민신문 대표이사)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윤혼 옹은 은인의 아들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놓을 줄을 몰랐고 은인의 사진을 보며 울었다. 김정배 님은 어릴 때 모친으로부터 그 얘기를 종종 들었다고 한다. 60년 은혜는 갚았다. 윤혼 옹은 넉넉한 상주 인심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같다면서 좋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자는 얘기를 남기고 못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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