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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7-12-29 13: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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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도지사 김관용)는 최근 도문화재위원회를 개최하여 “안동 보광사 목조관세음 보살좌상 및 복장유물”을 국가지정문화재(寶物)로 지정신청하기로 하였으며, “경절공 손중돈 정부인 홍씨의 묘갈, 석인상”, “문경 대승사 사면석불”, “섬계서원” 등 3건을 도지정문화재로, “안동 부포리 계상고택”, “봉화 옥류암”, “와선정” 등 3건을 문화재자료로 지정키로 하였다.
 
이번에 6건의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경상북도의 지정문화재는 총 1,742점(국가지정 568, 도지정문화재 654, 문화재자료 520)으로 국내 지정문화재의 약 18%가 된다.

아울러, “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김천 봉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영주 유연당”, “상주 상락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 “영덕 오봉종택” 등 5건을 도지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지정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번에 문화재적인 가치가 인정된 문화유산은 지정예고절차를 거쳐 차기 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안동 보광사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은 높이가 118㎝에 달하는 등신대의 불상으로 조형성이 완벽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이다.

보관(寶冠)을 쓰고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맺었으며 오른발을 위로 하여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오똑한 코와 탄력 있게 도드라진 턱, 어깨 위로 드리워진 머리카락, 화려한 영락(瓔珞)과 왼쪽무릎의 삼각형 주름 등의 특징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유사성을 지니므로 조성연대는 고려 후반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도금(鍍金)으로 인해 영락이나 보관의 세부가 불명확한 아쉬움은 있으나, 현존하는 목조관음보살좌상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寶篋印陀羅尼經』등 복장물(10種 193點)의 대부분이 고려시대 인본(印本)이므로 일괄하여 국가지정문화재(寶物)로 지정 신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울러, 이번에 도지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로 지정이 확정된 6건에 대한 지정사유는 다음과 같다.

景節公 孫仲暾 貞夫人 洪氏의 墓碣, 石人像 이 묘갈(墓碣)과 석인상(石人像)은 景節公 孫仲暾(1463~1529)의 처인 정부인 홍씨(貞夫人 洪氏, 첫번째 처)의 묘소에 위치한 묘갈(1基)과 그 좌우의 석인상(2基)이다.

정부인 홍씨는 1464년에 父 홍흠손(洪欽孫)과 母 한씨(韓氏) 사이에서 출생하여 손중돈과 혼인하였으나 1500년에 3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547년에 건립된 묘갈과 석인상은 건립연대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묘갈의 찬자(撰者)이자 서자(書者)인 이언적(李彦迪)이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석인상은 양식상으로도 특이한 점이 보이므로 일괄하여 有形文化財로 지정한다.

聞慶 大乘寺 四面石佛 『三國遺事』권4 탑상조에 의하면, 대승사 사면석불에 대한 내용이 신라 진평왕대에 보이고 있어 그 조성시기는 6~7세기로 추정된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사각형 형태의 방주석(方柱石)으로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으며 四面에는 모두 불상 1구씩이 새겨져 있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세부 문양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모두 여래상인 것으로 보인다.
 

동쪽과 서쪽은 좌상(坐像)이고 남쪽과 북쪽은 입상(立像)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동쪽의 좌상은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이 사면석불은 사방불이면서도 신라의 왕도인 경주가 아닌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비록 마멸이 심하여 불상의 세부파악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현존 몇 안 되는 우리나라 사방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므로 有形文化財로 지정한다.

剡溪書院 섬계서원(剡溪書院)은 박팽년과 같이 단종 복귀를 꾀하다가 수절한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 1399-1456)선생의 충절․강직함을 추모하고 그의 맏아들 영월군수 여병재 현석공(如甁齋 玄錫公), 반곡 장지도(盤谷 張志道), 절효 윤은보(節孝 尹殷保), 남계 서질(南溪 徐騭)을 배향하기 위하여 1802년 건립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될 때 그 자리에 김문기 선생의 원허비(院墟碑)를 세웠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보수되면서 건립 당시의 건축형태를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역사적 측면에서 단종 복위 문제로 죽은 김문기의 복권(復權)과 추모가 어떠한 경위로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 현장으로서 지정가치가 있어 記念物로 지정한다.

安東 浮浦里 繼尙古宅 계상고택은 퇴계 이황의 11세손인 이만응(李晩鷹,字繼尙, 1829-1905)이 1800년대 후반에 지은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7칸의 ㅁ자형 건물이다. 역동 우탁(易東 禹倬)을 배향한 역동서원의 구지에 안동댐 호수를 바라보며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부포리 마을이 안동댐 건설로 인해 모두 수몰되어 없어지고 계상고택만 홀로 남아있다.

이만응은 1895년 12월에『禮安通文』을 작성하여 배포함으로써 의병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여 한말 의병 항쟁사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상고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이긴 하나 규모가 매우 크며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유상고와 누당 등 건축적으로 독특한 점이 많아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있어 文化財資料로 지정한다.
 
奉化 玉溜庵 옥류암은 두곡 홍우정(杜谷 洪宇定, 1595-1656)이 은거하던 정자로 문수산 아래의 뒤뜰물 마을 뒷산 자락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곳은 太白五賢 -잠은 강흡(潛隱 姜恰), 각금당 심장세 (覺今堂 沈長世), 포옹 정양(抱翁 鄭瀁), 손우당 홍석(遜愚堂 洪錫)- 등으로 추앙받던 학자들과 교류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정자는 1637년에 건립하여 1756년에 와가(瓦家)로 중건한 후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전액 현판과 태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기문을 걸었다고 하며 1876년에 다시 중수 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며 정자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는데 전면 우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으며, 정자의 우측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주사를 최근에 중건하였다.

옥류암은 건축적 특성과 아울러 전면에 조성한 3개의 연못이 조영되어 있으며 시문(詩文)에 연과 구기자, 국화,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심은 기록 등은 조선시대 조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태백오현으로 추앙받은 당대의 학자들과 함께 교류하였던 역사적 장소성 으로서의 가치가 있어 文化財資料로 지정한다.
 
臥仙亭 와선정(臥仙亭)은 춘양면 소재지인 의양리에서 학산리로 가는 길목, 골띠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1635년(인조14) 두곡 홍우정(杜谷 洪宇定)선생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나 창건 당시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정면에는 판문이 각 칸에 1개소씩 설치되어 있고, 시냇물과 면한 후면에는 세살분합문이 들어열개식으로 되어있으며 와선정 주변에는 폭포와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주변 경관이 아주 뛰어나다.

또한 병자호란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과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키겠다고 모인 太白五賢의 회동장소와 관련된 유적으로 조사 연구 등의 가치가 있으며 주변 경관이 잘 갖춰진 정자로 보존가치가 있어 文化財資料로 지정한다.

경상북도는 전국 最高․最多의 문화재를 보유한 광역자치단체로서 문화재 보존․관리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러한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적극 모색해 나갈 방침이다.

아울러,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해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을 지속적으로 늘려감으로써 예산절감과 지역 문화재의 위상을 제고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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