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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2-25 23: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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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있던 충의와 의부로 알려진 이명우(李命羽) 부부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동안 이명우 부부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실은 안동 출신이며, 1920년 12월 부부가 함께 독을 마시고, 자결 순국했다는 내용이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어 먼 기억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09년 1월 이명우의 손자 이일환(대구시 동구 불로동)씨와 그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안동독립운동기념관(관장 김희곤)은 3․1만세운동 90주년을 맞아 이들 부부의 자료를 공개했다.

이에 2월 25일 오후 3시 이명우 지사의 후손이 독립운동기념관을 직접 방문해 원본자료 제공 및 인터뷰에 응했다.

이명우(1872~1920, 본관 진성, 자 明甫, 호 誠齋)는 안동 예안면 부포마을에서 퇴계의 후손으로 태어나 보통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家學을 통해 유학자로 성장했다.

14세에 이르러 봉화 유곡(닭실마을) 안동권씨 권성(權姓: 1868~1920, 당시 17세)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189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를 당하자 나라 일을 애통하게 여겨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문을 닫고 칩거, 1910년 끝내 나라가 망하자 근심과 분노로 그의 건강은 더욱 쇠약해졌던바 이때 그는 이미 목숨을 끊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아직 부모가 살아있어 그 뜻을 잠시 접어두었다.

1918년 10월 모친상에 이어 두 달 만인 12월에 광무황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이명우는 서쪽을 향해 통곡하고, 머리를 풀고 미음을 먹으며 상을 치르고 아침 저녁으로 망곡(望哭)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에 이르자 자결의 결단을 내렸다.

1920년 12월 20일(음력) 저녁, 이명우와 권성 부부는 자식들을 물리치고, 독을 마시고 자결하면서 비통사(悲痛辭)와 경고(警告), 유계(遺戒)를 남겼던바 그가 남긴 글에는 나라를 잃고 10여 년 동안 분통함과 부끄러움을 참았으나 이제는 충의(忠義)의 길을 가겠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명우가 가는 길이 ‘忠義의 길’이었다면 그의 부인 권성의 길은 忠義를 행하는 지아비에 대한 ‘의부義婦’의 길이었던바 권성은 남편을 따라가며 네 통의 한글유서를 남겼는데 아들 삼형제와 두 며느리에게 보내는 유서에는 ‘충의의 길’을 따르는 남편을 따라 가겠다는 간곡함이 담겨있었으며 임금과 신하사이에 의리가 있듯이 부부사이에도 의리가 있으니 자신은 ‘義婦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관장(김희곤)은 이번 자료가 공개되면서 이명우 부부의 자결순국이 갖는 독립운동사적 의의를 첫째 이는 나라를 잃고 부부가 함께 자결순국한 유일한 사례라는 점, 둘째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권성은 일제강점기 자결순국한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 셋째 여성이 한글 유서를 남긴 사례 또한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국문학적 자료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넷째 안동은 일제강점기 10명의 자결순국자를 배출하였는데 류도발 류신영과 같이 부자(父子)가 자결한 사례에 이어 부부가 함께 자결한 사례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안동인의 특성 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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