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와 생활 등으로 함께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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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도청이전지인 안동·예천의 자율행정통합 밑바탕에 정신적 통합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근 안동·예천의 행정통합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자 일각에서는 이 사안을 다시 들춰내 경북도청신도시건설과 안동·예천 행정통합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져야 다가올 다양한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앞서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은 안동·예천 행정통합이 정부의 최소한 개입으로 자유스럽게 이루어지려면, 먼저 정신통합, 즉 문화와 생활 등으로 함께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예천 땅덩어리는 조그맣지만, 땅이 기름져 농사를 적게 지어도 잘살고 예천 사람은 '물밑의 3백리도 걸어간다'할 정도로 강하다. 강하다는 것이 성격이 별나서가 아니라 대쪽 같은 면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국인이 예천군에 못 붙어살아 중화요리집이 없을 정도였다"
이재춘 안동문화원장은 예천군을 이같이 평가하며 안동과 모든 면에서 닮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안동처녀가 예천에 시집을 많이 가고 예천처녀가 안동에 시집을 많이 와 연사간(連査間)이 많다"며 "예천과 안동은 강(낙동강, 삼강주막), 예의범절, 음식, 옷, 문화, 생활, 가족구성원,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똑같다. 행정구역만 나뉘어져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또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할 때 예천을 통해 안동으로 들어왔다"며 "조선통신사 역시 부산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예천과 안동을 지나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시작과 끝의 중앙에는 예천과 안동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방증한다.
특히 이 원장은 '예천농요'에 대한 우수성을 높이 샀다. 이 원장은 "대한민국은 농경사회가 바탕이 됐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볼 때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4-2호와 경북무형문화재 제10호인 예천통명·공처농요는 예천군의 큰 자랑거리"라고 말했다.
실제 한 지역의 농요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는 어렵다. 농악의 경우 경상도 삼천포, 강원도 강릉, 경기도 평택, 전라도 우도(익산), 좌도(임실) 등 5개 지역이 합쳐져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보아도 예천농요의 자산 가치 설명은 충분하다.
안동 역시 다양한 종가문화를 비롯해 저전동농요(경북무형문화재 제2호), 하회별신굿탈놀이(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차전놀이(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4호), 놋다리밟기(경북무형문화재 제7호) 등 특색 있는 문화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예천과 안동이 처한 상황을 두고 이 원장은 옛날 안동과 예안현(禮安縣)을 예로 들었다. 예안현은 고구려 때 매곡현, 신라 때 선곡현으로 내성군 순흥의 영현(領縣)이었다가, 고려 태조 때 선성(宣城)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됐다.
그 뒤 현종 9년(1018년) 길주(吉州), 즉, 안동 땅에 복속되었다가 우왕 2년(1376년) 우왕의 태를 이 고을에 묻은 것을 기념으로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 공양왕 2년(1390년) 감무(監務)를 두었고 의인현(宜仁縣)을 병합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년) 현이 되고,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계 개편에 의해 예안군이 됐다. 읍내·서면·북면·의서·의동·동상·동하 등 7개 면을 관할했는데, 1914년 4월1일 읍·면 통폐합에 따라 안동군에 편입돼 예안·도산·녹전 등 3개 면으로 분리됐다.
이 원장은 "안동은 시장이 발달한 곳이었고, 예안현은 향교와 종가 그리고 유교문화가 꽃을 피워 시대의 걸출한 인물을 다수 배출한 지역"이라며 "안동과 예안이 통합될 때 예안현의 반대가 매우 심했지만, 안동이 경제와 교통 등에서 앞섰기 때문에 통합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10일 안동시는 충남도청과 세종시, 경북신도청(예천, 안동)을 잇는 동서5축 고속도로 건설 타당성 조사비 20억원이 국회 국토해양위원회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이르면 11월 중순 계수조정소위가 5조 3천억원의 최종 예산안 반영을 결정한다면 안동과 예천은 초광역도시로의 성장을 눈앞에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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