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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그 새로운 힘, 코리언스피릿
  • 권기웅 기자
  • 등록 2012-01-10 14: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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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화 임진년(壬辰年), 다시 만나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서기 2012(단기4345)년 임진년, 요동치는 격변의 한반도에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한 반도를 둘러싼 4강 중 미국, 중국,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 선출이 있고, 지난 연말 북한의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 체제로 굳어가나 안정화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대한민국은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남, 북, 노, 소, 좌, 우의 대립과 갈등이 불거져 어쩌면 생존을 위협 당 할 정도로 급박하다. 420년 전 이 맘 때처럼 온 나라가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헐뜯으며 어디로 나아가는지 한 치 앞길을 모르는 실정이다. 임진왜란의 1592년, 이맘 때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이럴 때일수록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거국적인 비극을 수습하고 지상에서 사라져가는 나라를 붙잡아 되살린 위대한 경세가 서애 류성룡 대감이 그리워진다. 임진왜란이라면 대부분 이순신 장군을 떠 올리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쩌면 장군보다 더욱 거시적인 안목으로 나라를 구원 한 분이 서애 대감이시다.

재상이자 군 수뇌인 도제철사, 외교관으로서 전란을 치러낸 류성룡은 양민입장에서 제도개혁을 주장하고, 전시를 맞아서도 이를 부분적으로나마 실천해내었다. 서애 대감은 당시 조선은 이미 나라가 아닐 정도로 체제가 무너졌다고 보았고, 이 약점을 오히려 전쟁을 수행하면서 경제·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실천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서애 대감의 가장 큰 장점은 인재를 알아보는 지인지감과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에 있었다. 나라를 구할 인재로 권율, 이순신을 파격 등용하여 적소적시에 배치하였고 반상을 떠나 중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였다. 판단상의 실책을 저지른 학봉 김성일을 재기용하여 영남 의병의 핵심이 되게 하여 전세를 뒤 짚을 기반을 마련하였다.

학봉과 서애는 퇴계를 스승으로 동문수학한 사이었고 학봉은 목숨으로서 자신의 과오를 갚을 수 있었다. 서애는 무엇보다 “나는 기어이 압수(압록강)를 넘으리라.” 면서 그저 북으로, 명(明)나라로 도망만 가려는 임금 선조를 수행, 보좌하여 항전의 구심점을 사수하였다. 당시 대세를 이룬 함경도 파천론에 맞서 명과 가까운 지역인 의주로 어가를 몽진시켜 명(明)의 참전을 유도하였다.

또, ‘명군은 참빗, 왜군은 얼레빗’이라는 속담처럼 점령군이 되어가는 극도로 오만한 이여송과 명군을 상대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다. 극도로 피폐한 상황에서의 병참 지원, 조선측에 패전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에 대한 해명, 조선 조정이 왜와 내통하고 있다는 명의 의혹 해소, 심유경의 강화외교의 실체를 파악하고 철군론과 타협론에 대한 제동, 극심한 명군의 횡포와 폐해를 줄이는 일 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영의정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여송으로부터 곤장을 치겠다는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나아가 명의 왕위 교체론과 직할통치론, 그리고 선조까지 찬성한 전후 명군 주둔론을 분쇄시키기 위하여 분골쇄신 하였다. 일본의 거침없는 쾌속 진주에 위협을 느낀 명나라는 조선을 반으로 나누어 일본과 나누어 통치하고, 임금을 교체해야 한다는 복안을 구상하였다.

한강을 경계로 남쪽인 전라, 경상, 충청, 경기 남부는 일본에 할양, 북쪽인 함경, 황해, 평안, 강원도는 명나라가 직접 통치하는 방안이다. 이름 하여 명나라의 분할역치(分割易置)발상이다. 조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협상테이블에서 빠져 있는 상황으로 남북분단은 이미 4백년 전에 명(明)·왜(倭)끼리서 은밀하게 논의되었다. 이 낌새를 우리 측에서 가장 먼저 알아챈 인물이 서애 대감이었고 최악의 상황인 분할통치를 저지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결국 명군 지휘부의 강화 상주 요구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탄핵을 받아 재산을 몰수당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1598년 11월 19일(음력) 아침, 남해 노량바다 관음포에서는 그토록 아끼던 이순신 장군이 적탄을 맞고 전사하고 그 시각 서애는 선조로부터 사직을 당한다. 대인기피증까지 걸린 서애 대감은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 그는 초가삼간에서 묵묵히 뼈를 깎아, 피를 찍어 금쪽같은 '징비록'을 써 후세에게 철저한 준비를 당부하면서 생을 깨끗하게 마무리를 한다.

켜켜이 쌓이고 겹친 조선의 모순이 폭발한 420년 전의 임진왜란은 결국 서애 대감의 실용적 리더십과 탁월한 치국경륜으로 기적적으로 극복되었다. 적을 앞두고도 갈라서 싸우는 조정의 신료들, 일본군의 맹렬한 파죽지세와 음흉한 명나라 점령군으로서의 속내를 터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구국의 일념으로 봉합하여 살려낸 약소국의 재상으로, 참된 한 인간으로서 서애 유성룡 대감을 이제 우리는 바로 보아야 한다.

다시 선 임진년.
국민 모두가 옷깃을 바로 하고 서애 대감의 한없는 좌절과 늘 그 보다 한층 더 높고 깊고 뜨거운 구국의 단심(丹心)을 제대로 알아 올해 임진년의 누란의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한다.
 
<글, 원암 장영주(蔣永柱 64)>
現 (사)국학원 원장(대)
現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원장
現 한민족정신지도자연합회 대표회장
現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前 세계 100대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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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2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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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1-14 00:23:13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며 부끄럽지 않을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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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1-11 19:51:59

    임진왜란 발발 420주년을 맞아 안동인으로서 경세 치국의 탁월한 리더였던 서애 유성룡선생을 새삼 떠올리며 추모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삼대 대첩의 영웅 이순신, 권율, 김시민을 낳으신 분이 바로 서애선생이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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