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국학진흥원, 한.중 학자, 도산구곡 무이구곡 비교를 위한 공동연구 추진...
도산구곡은 퇴계가 쓴 시의 제목이거나 퇴계가 지정한 경승지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퇴계는 생전에 도산구곡을 지정한 적도 도산구곡이란 용어를 사용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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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퇴계의 후학들은 도산구곡을 퇴계의 문학과 사상이 서려있는 자취로 인식해 왔다.
이점은 도산구곡이 단순히 경승지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주자가 직접 경영했던 무이구곡을 모델로 했지만 중국과 다르게 한국유학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문학의 현장이 아니라 조선유학의 역사, 철학이 종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바로 구곡문화이다.
이번 연구는 70년대 중반 안동댐 건설로 도산구곡의 일부가 수몰된 이후 최초로 배를 타고 한․중 학자들이 공동으로 그 현장을 학술조사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경북 안동 도산면 일대의 도산구곡을 중국 복건성 무이구곡과 비교연구를 통해 한국 유학의 독자성을 밝혀내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안동시의 지원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 연구를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원장, 김병일)과 중국 복건성 송명리학연구중심은 학술세미나(11.2, 안동문화예술의 전당 국제회의장), 도산구곡 현장답사(11.4) 등을 11월 1일부터 6일까지 안동 일원에서 실시한다.
도산구곡(陶山九曲)이란 안동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낙동강을 따라 펼쳐진 아홉 군데 경승지를 가리킨다. ‘곡(曲)’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홉 군데 경승지가 모두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골짜기를 끼고 있기 때문이다.
운암, 월천, 오담, 분천 등 아홉 군데 장소의 명칭은 모두 퇴계 이황(1501-1570)의 시문이나 유적에서 따왔다. 이 때문에 도산구곡은 단순히 경승지에만 그치지 않고, 퇴계사상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 한국사상사의 유서 깊은 현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도산구곡’이라는 명칭 자체는 퇴계가 지은 것이 아니다. 이 명칭은 17세기 초에 편찬된 예안지역 군지인 '선성지(宣城志)'에서 처음 언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퇴계는 주자를 학문의 모범으로 삼아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시를 차운하였지만, 스스로 구곡을 경영하지도 도산구곡이란 명칭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퇴계를 이은 후학들은 퇴계가 생전에 사랑하던 아홉 곳을 선정하여 도산구곡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바로 이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퇴계는 주자를 존경해 무이구곡시를 차운했지만 스스로 도산구곡을 경영하지 않았고, 퇴계의 후학들은 퇴계를 존모하여 도산구곡을 설정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 참가하는 연구자들도 이점을 주목하여 그 원인을 분석한다. “기호지방에서 구곡경영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영남에서 구곡경영이 활기를 띠지 않았던 것은 퇴계가 직접 구곡경영을 시도하지 않은데 있지 않을까”(안동대 이종호 교수)라는 견해를 일차적으로 제시하면서도, 그러다가 “율곡이 경영했던 고산구곡도가 기호학파의 결속을 다지는 매개로 널리 보급되던 17세기 후반기에, 영남에서도 도산도가 제작되면서 영남의 유학자들은 퇴계학파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시작”(한중연 윤진영 박사)하였고, 그것이 도산구곡의 설정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퇴계가 즐겼던 경승지이면서 단순히 경승지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주자가 직접 경영했던 무이구곡을 모델로 했지만 중국과 다르게 한국유학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도산구곡.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도산구곡은 문학, 역사, 철학이 종합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한국 구곡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이번 연구에서는 특히 안동시의 협조를 받아 수몰된 제1곡 운암에서 제5곡 탁영담까지 연구진들이 직접 배를 타고 현장을 확인하고, 제6곡 천사에서 9곡 청량산까지는 도보로 답사할 계획이다.
따라서 이번 시도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이후 최초의 학술답사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선현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도산구곡을 배와 도보로 직접 체험함으로써 문헌을 통해 확인하지 못했던 한국유학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요 일정>
한중국제학술세미나 11. 2(수) 10:00-16:00, 안동문화예술의 전당 국제회의실
도산구곡현장답사 11. 4(금) 10:00-15:00, 1~5곡(오전, 승선), 6~9곡(오후, 도보)
<자료 도판>
《武夷圖ㆍ陶山圖》, 19세기, 지본담채, 106.7×77.0㎝, 개인소장
두 폭에 도산도와 무이도가 각각 한 폭씩 그려진 이례적인 구성이다. 두 도상이 각각의 화면에 그려져 하나로 꾸며진 것은 조선후기 영남유학자들에게 이황의 도산(陶山)과 주희의 무이구곡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되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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