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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7-03-01 22: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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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농업은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개방이라는 대세 앞에서 우리 농업인들은 세계 각국의 농산물과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이제 보조적 역할에 머물던 여성농업인들은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새로운 성공신화를 쓰고 있다. 또 결혼이민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농촌 사회의 새로운 문화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림을 그리던 스물아홉 서울 주부가 목장을 일구겠다며 남편까지 설득해 경기 여주땅으로 귀농한 지 26년. 조옥향 ‘은아목장’ 대표는 이제 한국 낙농업계의 대표적 여성 경영자로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 대표는 2002년 농업인들의 최고 영예라는 대산농촌문화대상을 수상하며, 성공 여성농업인으로 인정받았다. 젖소 3마리로 출발한 ‘은아목장’은 현재 165마리 젖소에서 연간 9000~1만kg의 우유를 생산하는 중견 목장으로 성장했다. 지금 은아목장은 우유만 생산하는 목장을 넘어 국산 수제치즈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본거지로 변화했다.

조 대표가 ‘귀농’을 결심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족이 함께 일하면서 살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 조 대표는 스물일곱 살에 세 살 연상의 건설사 샐러리맨과 결혼했다.

친정아버지 소유의 33헥타르 황무지만 믿고 무작정 ‘목장 만들기’에 돌입했다. 미처 집 지을 여유가 없어 텐트생활을 하며 풀 뽑고 돌 고르기를 꼬박 2년. 젖소 3마리로 목장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으로 녹초가 된 남편 대신 지역 낙농인 교육에 참가했는데 참가자 중 여자는 조 대표 한 사람뿐이었다.
 
애들을 데리고 수업에 갔다가 쫓겨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워낙 나서길 싫어하는 남편 대신 어쩌다 관청에 들르면, “남편 데려오라”는 노골적인 무시도 일상이었다.

하지만 낙농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여기저기 열심히 쫓아다녔고. 꿋꿋이 버티다보니 조 대표의 열성에 감동한 지역 낙농전문가 한 분이 과외선생으로 나섰다.

“낙농의 기본은 ‘기록’이라는 그 분의 말에 따라 무조건 적었어요”

조금씩 눈도 틔어가고, 자신감도 붙었지만 정작 넘어야 할 산은 바로 남편이었다. 배운 것을 남편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가부장적인 남편은 도대체 귀를 기울여주질 않았다. 남편이 자존심 상할세라 눈치봐 가며 배운 것을 하나하나 적용하다 보니 실제 성과로 나타났다.

‘굵은 손마디와 거뭇한 피부, 넉넉한 자태에 소탈한 웃음까지 마음씨 좋은 목장주 모습이 그의 첫인상이지만, 사실 몇 분만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조 대표의 머릿속에 담겨진 ‘한국 낙농업의 비전’과 ‘도전의식’에 함께 흥분하고 경탄하게 된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대부분의 농·축산물이 ‘가격’에서 경쟁력을 갖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맛’에선 분명 경쟁력이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 농가의 블루오션입니다”

조 대표의 새로운 블루오션은 바로 ‘수제 치즈’다.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도 익숙하지 않고, 보관·유통이 까다로운 이 수제 치즈를 만들겠다고 하니 주변에선 ‘안된다’고 고개를 흔든다.

1996년 우량젖소 품평대회인 ‘한국홀스타인 품평회’에서 챔피언을 획득하고, 부상으로 가게 된 일본 연수. 그곳에서 조 대표는 일본 목장주로부터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들었다.

“부부 둘이 1톤의 우유를 생산했을 때 4식구가 먹고 살았는데, 그 1톤으로 치즈를 만들었더니 50명이 먹고살 수 있더라”는 말이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때부터 ‘수제 치즈’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수제 치즈를 만들어도 법적으로 판매허가 받기도 어렵고 판로도 없었지만 ‘낙농업의 미래는 가공을 통한 부가가치 상승에 있다’는 믿음으로 일단 실행에 옮겼다.

조 대표는 얼마 전 직접 만든 치즈를 들고 이탈리아 전문 식당을 찾았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해 온 치즈와 국산 치즈로 조리한 후 맛 평가를 부탁하기 위해서다. 결과는 조 대표의 승리였다. 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앞으로 치즈, 버터,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등 ‘은아목장’의 브랜드를 단 제품을 하나 둘 생산할 계획이다.

“유가공품의 생명은 바로 ‘신선도’입니다. 좋은 치즈일수록 유통기간이 짧은데 수입 치즈는 보존을 위해 열처리를 더하거나, 아니면 맛이 약간 변하게 되요. 국산 치즈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죠”

조 대표는 국내 낙농산업의 발전을 위해 먼저 소비자들이 품질 좋은 우유와 유가공품의 맛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체험목장을 여는 이유도 ‘소비자와 직접 만나기’ 위해서다. 대형마트에 갈 때마다 조 대표의 화를 돋우는 제품은 바로 각종 첨가물 우유다.

“아이들을 타깃으로 만드는 ‘~향 우유’는 대부분 외국산 저질 분유를 원료로 사용하고 있어요. 수입 유통기간 때문에 당연히 고온 멸균 처리된 우유일 수밖에 없고요. 우리 아이들이 ‘우유는 원래 이런 맛’이라며 당연하게 선택하게 둘 수는 없어요”

"“농장을 일구고, 좋은 우유를 생산하고, 국산 수제 치즈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까지가 제 일입니다. 그 다음은 딸의 몫이죠”

딸만 둘인 조 대표가 그저 별 생각없이 “이 소들 다 키워 누굴 주나”하는 말을 듣고 자란 둘째 딸이 ‘엄마처럼 살겠다’며 일찌감치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한 것이다.

“한국 농업의 희망은 여성과 가공산업(부가가치형 상품개발)에 있어요. 우리 토종 재료에 음식이라는 문화를 입혀 수출하고, 각 지역의 전통이 살아있는 농가에 팬션 자격증을 주고, 지역의 자연환경에서 자라고 재배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브랜드가 될 수 있어요”

프랑스의 수천 가지 치즈가 그렇게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고, 유럽의 농가가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농촌특화’ 산업에 있다는 것을 그가 직접 보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요즘 두 달에 한 번씩 중국 길림성에서 ‘낙농기술’ 강의를 진행한다. 그가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축산사료 회사가 주최한 프로그램인데 현지의 반응이 좋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의 강의가 입소문을 타면서 중국 정부는 조 대표에게 목장을 마련해줄테니 몸만 와서 직접 경영하며 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권하고 있다.

조 대표는 새로 치즈 사업을 계획하고 있어 중국 측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중국에서 먼저 우리의 낙농기술을 인정받고, 다음에 동남아시아 등으로 퍼져나가면 이것 역시 한국 농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신중히 고려 중이다. 일본 여성 낙농인과는 이미 교류가 있으니 한·중·일 여성낙농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함께 협력하면 어떨까? 머릿 속에 아이디어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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