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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백 년 전 햇살 따사로운 가을날,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백발노인이 때때옷(색동옷)을 입고 아흔이 넘은 노인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老萊子의 이야기가 아니다. 안동 도산면 분천리 바위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애일당愛日堂에서 펼쳐진 일이다.

당시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던 사람은 우리나라 강호문학江湖文學의 창시자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다. 농암은 남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각별한 효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1512년에 늙으신 부모를 위해 안동 도산면 분강 기슭에 정자를 짓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붙였다. ‘애일愛日’은 ‘하루하루의 날을 아낀다’의 뜻이므로 ‘애일당’이란 ‘부모가 살아계신 나날들을 아끼는 집’이 되는 셈이다.

농암은 나이 드신 부모를 봉양할 ‘날(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한 심정을 ‘애일愛日’이라는 단어로 응축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특별한 날이나 명절 때마다 아우들과 함께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늙으신 부모와 마을 노인들을 즐겁게 해드렸다.

이처럼 농암이 실천한 효문화는 가족과 친족에 국한되지 않고 마을공동체 나아가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야말로 범인류적 애민사상愛民思想이었다.

또 1519년 가을에는 안동부사로 재직하면서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80세 이상의 노인을 모시고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을 개최했다.

기록에 따르면 청사廳舍 마당과 마루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노인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농암은 “안동의 옛 풍속이 나이는 숭상하나 관직은 숭상하지 않는다”면서,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고 순전히 연령만을 따져 초대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고을 원의 신분으로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사였던 셈이다.

1533년, 농암은 자신이 세운 애일당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노인 여덟 분을 모시고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이때 그는 이미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홍문관 대제학이라는 정2품의 높은 벼슬에 있었다. 그리고는 이날의 모임을 아홉 분의 노인이 애일당에 모였다는 뜻에서 ‘애일당 구로회九老會’라고 이름 지었다. 당시 농암의 부친 이흠李欽은 94세였으며, 나머지 여덟 명을 포함한 전체 연령은 740세였다.

흥미롭게도 1569년에 열린 구로회에는 퇴계 이황도 69세의 나이로 참여했으며, 그의 다섯째 형 이징李澄(72세)도 회원이었다. 1533년에 결성된 구로회는 1979년에 마지막 모임을 가졌는데, 당시 농암의 16대종손 이용구李龍九(1908∼1998)옹이 회원으로 있었다.

이처럼 농암의 부친 이흠을 중심으로 결성된 구로회는 그가 세상을 뜨면서 농암 자신이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이후 아들과 손자, 후손들이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약 5백 년 동안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 잡아왔다.

10월 18일(목) 오전 10시, 한국국학진흥원과 예안향교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위치한 농암종택에서 애일당 건립 5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및 기로연耆老宴을 개최한다.

5백 년 전 농암 이현보가 그랬듯이 농암의 17대종손 이성원李性源(60세)씨가 때때옷을 입고 향연을 펼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주최측은 안동시군에 거주하는 각계각층의 80세 이상 남녀노인 150명을 모셨으며, 경로효친의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아들과 며느리, 손자 등 배행자輩行者 150명도 각각 초청했다.

이번 행사의 백미白眉는 5백 년 전 농암이 애일당을 세우고 구로회를 만들었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시詩를 지어준 이들의 후손을 수소문하여 함께 모신 일이다.

당시 농암의 동료와 친구 43명이 시를 보내왔는데,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보물 1202호)에 이들의 친필시가 전한다. 이날은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양곡陽谷 소세량蘇世讓, 곤암困菴 소세량蘇世良 등의 후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경기도와 전라도 등 전국각지에 살고 있는 이들 후손들은 5백 년 전 자신의 조상이 인연을 맺은 가문의 기로연에 초청을 받아 감개무량했다는 후문이다. 이로써 5백 년 전의 역사적 현장에서 신구新舊 세대가 함께 어우러지는 색다른 기로연이 펼쳐지는 셈이다. 아울러 1979년을 마지막으로 열린 ‘애일당 구로회’가 다시금 재현되는 뜻 깊은 날이기도 하다.

행사 당일에는 국악공연 및 종손의 때때옷 향연을 비롯하여 강구율(동양대학교) 교수의 ‘애일愛日에 담긴 농암 이현보의 효사상’과 오석원(성균관대학교) 교수의 ‘유교의 효사상과 현대사회’라는 강연도 마련되어 있다.

강구율 교수는 “농암 이현보가 실천해온 효사상을 ‘애일정신’으로 명명하여 오늘날의 새로운 효문화로 계승· 발전시켜나가자”고 제안했으며, 오석원 교수는 “진정한 효사상이란 내 부모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 나의 부모에게만 그치지 않고,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되어야만 진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효문화의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기를 기대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혈연중심의 전통적 효사상에서 탈피하여 모든 인류를 아우를 수 있는 세계보편적 효문화로 확대시켜나가야만 지속가능한 생명력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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