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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11-29 08: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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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소비자연맹(회장 임경희)에서는 400년을 이어온 대구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인 서문시장의 19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모습과 전통시장 상인들의 모습을 담은 자료 전시회를 개최한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부여된 지위는 실제 그들이 가지는 영향력에 비해 과소평가되어 왔다.
 
이는 사농공상으로 계층화된 조선시대의 신분질서가 우리의 의식 깊숙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사회경제적 변화가 워낙 급속했기 때문에 전통시장의 경제 장악력이 급감한 상황에 연유한다. 한 때 전국 굴지의 시장으로 꼽혔던 대구 서문시장, 또는 시장 상인들이 처한 상황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이래 장돌림으로, 피난살이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시장에 모여들었던 민중의 생활모습을 담고 있는 시장 곳곳은 그 자체가 대구지역의 20세기 역사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서민 삶의 흔적이기 때문에 ‘하찮은 것’이 아니라 20세기 한국의 사회상황, 지역의 현황, 생활양식을 밝혀줄 중요한 생활 자료들이다. 대구소비자연맹의 이번 전시회는 살아 움직이는 역사의 보고를 대구 시민들과 함께 보고, 느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400년을 이어온 대구시민의 삶터, 서문시장의 어제와 오늘>전을 통해 전통시장이 단순한 시장의 기능 뿐 아니라 우리가 가꾸고 보존해야 귀중한 문화유산인 점도 인식하고 백화점. 대형 유통마트 등에 밀려나고 있는 전통시장을 살릴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서문시장의 역사:전통 시장의 변화과정은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역사 대구경북 지역의 사람들에게 “큰 장”이라는 명칭으로 더 익숙한 서문시장은 조선시대부터 열리던 오일장이었다. 1600년 대 읍성 북문 밖에서 매 2일과 7일 열렸던 시장은 서문 밖으로 옮겨져 대구 읍장, 대구장, 큰 장(大場), 부내(府內)장 등으로 불리어지다가 일제의 경제침탈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1909년 현재의 명칭인 서문시장(西門市場)으로 이름 지어졌다. 1922년 9월 현재 위치로 옮겨 영업 시작: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은 서문시장은 조선 후기부터 포목시장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이후 전국 3대 향시 중 하나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제에 의한 도심의 재편이 진행되어 갔고 읍성 서문 밖에서 열리던 서문시장도 1922년 9월28일 원래의 장터 서남쪽에 자리 잡은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천황당(天皇堂) 못을 메운 자리에 5개 지구로 구획되어 조성된 시장은 총면적 4,544평, 건평 496평에 잡화점 3동, 어물전과 곡물상 각 2동, 창고 1동, 1개의 파출소와 2개의 공동화장실을 갖추었다. 시장 경영권은 1914년 제정된 <시장규칙>에 따라 대구부에 귀속되었다. 해방, 6.26 전쟁 거치며 전국 최대 의류 도매시장으로 도약:그렇지만 8.15해방과 6.25전쟁은 서문시장을 전국 최대의 의류도매시장으로 도약시켰다. 6.25전쟁은 특히 서문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전쟁기간 중 대구에는 피난민들이 몰려 인구가 급증했고 군사중심지가 되었다. 다행히 일제가 건립했던 섬유공장 등 관련 시설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시장이 상설화하면서 전국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은 다투어 생필품을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고 휴전 후 정부는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기 위해 섬유관련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대구가 섬유도시의 기반을 갖추는 것과 함께 서문시장은 전국 최고의 포목판매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서문시장 포목부를 중심으로 한 시장주변에는 섬유도매상이 집중되어 대구지역 도매상의 50% 이상이 서문시장에서 영업을 하는 정도였다. 1950년대 서문시장의 상권은 영호남 및 강원도 일부까지 뻗쳤고 직물도매업은 특히 전국 섬유시장을 석권하였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시설의 복구가 이루어지고 각 지역 시장들이 제 기능을 회복하면서 서문시장의 위치는 점차 쇠락하기 시작한다. 거기에다가 크고 작은 화재가 잇달았고 1960년 6월 16일에는 대구가 생긴 이래 가장 큰 불이 일어나 건물 93동(건평 7,221평)과 노점 778동(건평 778평)등 시장 전체를 태우는 참사를 당해야 했다. 그렇지만 시장 상인들은 결국 다시 일어섰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쇠퇴 길로:1960년대 후반 화학섬유가 시장을 장악하게 되면서 서문시장의 상권은 더욱 위축되어 갔다. 거기에다가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에 따라 제조업분야의 성장이 진전되고 대량유통기관의 등장, 경부고속도로 개통 등 일대변혁이 이루어졌다.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구미·포항 등 신흥 지방산업도시가 형성됨으로써 서문시장의 상권 재편이 불가피해 졌다. 시장 내 도매 점포들은 점차 주변 지역으로 분산되어 갔다. 공설이었던 시장은 민영화되면서 운영주체가 분리되었고 1980년에 와서는 서문1지구 1층 시장, 서문 1지구 2층 시장, 서문2지구시장, 서문4지구시장, 서문5지구시장, 동산상가시장, 서문건어물시장, 곡물시장, 대신상가, 아진상가 등 10개의 단위시장이 서문시장 군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서문시장에는 8개의 층별․지구별 상가번영회(1지구 1층․2층, 2지구 지하․1층․2층․3층(화재 후 종합상가번영회로 일시 통합), 4지구, 5지구, 동산상가, 건어물 상가, 아진상가, 명품프라자), 4,000개 점포와 노점상 들이 성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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