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우리동네-예천군 보문면 독양리>어등역과 옥개천을 품고 살아온 마을이야기
독죽마을, 붉은재, 진양마을이 자리 잡은 독양1리
-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3)
  • 기사등록 2018-09-03 14:55:30
  • 수정 2018-09-03 15:26:46
기사수정
예천군 보문면 독양리는 독죽마을, 어등역을 품고 있는 붉은재, 진양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독양1리와 보건소가 있는 평장개, 인동장씨들이 모여 사는 막실, 안동김씨들이 모여 사는 들미고개 마을이 있는 독양2리로 이루어져 있다. 독양리는 보문면 중에서도 외지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예로부터 하천을 끼고 옥토가 많아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이름난 문화재나 특산품이 있는 것도 아닌 독양리를 주목하게 된 것은 철길과 함께 마을을 길게 가로지르며 열차가 달리는 경북선 간이역 어등역 때문이었다.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이 되었지만 1966년 개통 이래 수많은 사람들과 물자를 실어 나르며 독양마을 사람들의 사는 모양을 바꾸어 놓았던 어등역. 경북의 마을 이야기를 발굴해 엮어가는 근대기행 세 번째 여정은 어등역 역사 앞에서부터 출발해서 길게 뻗은 철길을 따라 자리를 잡고 살아온 독양리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어등역

어등역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예천 읍내에서 독양리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철길건널목이 어등역의 존재를 알려준다. 역사 쪽에 펜스가 둘러져 있어 반대쪽으로 길을 돌아 철길을 건너 어등역 역사를 찾아갔다. 관리자가 자리를 비웠는지 사람도 없이 텅 비어있는 어등역 역사 사진을 찍고 멀리 김천방향 선로와 반대편 영주 방면에서 오는 선로를 번갈아보며 잠시 서 있다가 차를 세워 둔 마을로 돌아 나오는데 영주 방면에서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2시 35분이 지나고 있었다. 기적 소리에 이어 열차진입을 알리는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고 이윽고 열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차는 하지 않지만 간이역을 통과하며 일시적으로 속력을 늦추는 덕분에 한낮의 기차를 찍을 수 있었는데 열차 안의 승객들이 밖을 내다본다. 간이역사에서 만나는 기적 소리도 승객들도 내심 반갑기만 하다.

▲기차는 간이역인 어등역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간다

1931년 개통되어 안동에서 김천까지를 이어주던 경북선은 1950년 한국전쟁 때 국군의 철수작전으로 예천 안동간 철로가 끊어지면서 한동안 안동과 예천간 교류가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예천 김천간 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경북선 철로는 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토균형개발계획에 따라 예천에서 영주로 다시 이어지게 된다. 예천에서 영주로 가는 길목 구간에 속했던 독양리에도 자연 철길이 놓이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사람들은 기대에 들떠 철도 개통을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철로를 깔기 위해 국토건설단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철로 공사에 일자리가 많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는 국토건설단 사람들에 의해 철길이 놓인다는 걸 알게 되면서 한풀 꺾였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비빌 언덕과 일거리는 얼마든지 있었고 사람들과 물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자연 마을에도 활기가 돌았다고 한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예천 국토건설단 5지단 시찰. 1966년. 국가기록원 소장.

▲어등역에서 선로를 깔기 위해 돌 깨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막실 김분남)

그것을 가장 먼저 느낀 이들은 어등역이 들어서는 인근 마을 주민들이었다. 특히 어등역이 들어서는 붉은재 마을에는 일꾼들이 먹고 자고 마실 공간들이 하나둘 지어졌다. 일꾼들 숙소를 제공하고 밥을 해주는 집들이 생겨났고 뒤이어 철로와 함께 철도 관사건물들이 들어섰다. 어등역이 문을 열면서 대합실 가까운 역전에는 차표 파는 집과 막걸리와 고기를 파는 집이 생겼고 철도관사 건물 앞에는 이발관과 점방(가게)이 연달아 문을 열었고 그 바로 앞에 큰 양조장이 자리를 잡았다.

▲어등역 대합실을 나와 작은 다리를 건너면 차표 팔던 점방(왼쪽)과 술과 고기를 팔던 식당이 나온다.

양조장 자리 바로 앞에 사는 박옥련(77세)은 간방리 덕거리에서 스물 하나에 스물넷 신랑 권영칠(80세)에게 시집을 왔다. 독짓골로 시집 와 시어른들 모시고 살다 고개 하나 넘어 여기 어등역 근처 붉은재로 살림을 나 지금껏 살고 있으며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시집와서 살다 분가를 했는데 우리가 온 지 얼마 안 돼 기차선로 공사를 하더라고. 그전 독죽 살 때는 고개 너머 감천장까지 걸어다녔는데 바로 앞에 어등역 생기고는 기차 타고 영주장 보러 다녔지. 우리 아저씨가 국수를 좋아해서 손국수 밀어서 자주 해먹는데 지금은 맛으로 먹지만 그때는 때꺼리가 없어 시도 때도 없이 해먹었지.”

옥련 할머니는 마을에 같이 살던 역무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역무원들이 옛날에는 여기 우리 동네에 방 한 칸 얻어서 곁방살이 하는 이들도 있었어. 점촌이 집인 사람도 있었고 멀리 사는 이들이 그래 했어. 그전에 어등역 공사하고 선로 공사하는 일꾼들도 동네에 밥해주는 집이 있어서 밥도 대놓고 먹고 방 얻어 놓고 자기도 했어.”

▲철도관사가 보이는 철길 옆 붉은재 전경

붉은재 마을의 철도관사와 전직 철도원 장화식

어등교회 쪽에서 독양교 다리를 건너지 않고 철길건널목을 건너 왼쪽으로 꺾어들면 입구에 농협창고가 보이는 마을이 붉은재다. 어등경로당 어르신들이 만담처럼 알려준 장화식씨가 사는 관사 건물이 곧장 눈에 들어온다. 관사 건물을 가기 전에 창고 건물 앞에서 옛 이발관집 사람을 만났다. 붉은재길 25번지로 당시 이발관 자리다. 이발관집 아드님이 마침 집에 있어 그때 일을 들을 수 있었다.

▲이발관, 양조장이 있던 자리. 지금은 농협창고로 쓰이고 있다. 창고 옆으로 보이는 작은 지붕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는 옛 이발관이다.

“어등역 생기고 그때 부친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발관을 했는데 장날이면 사람들이 많아서 이발하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아 조수를 두고도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이발을 하셨어요. 이 앞 양조장에서 술을 빚어 파는데 어른들께 듣기로 당시에 하루 막걸리 50말을 팔았다고 해요. 양조장집 어른이 김두옥이라고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양조장 팔고 보문면 소재지에 가서 거주하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죠.”

▲장화식씨가 살고 있는 철도관사

붉은재 철도관사에 사는 1948년생 장화식은 옥천초등학교와 감천중학교를 졸업했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보면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예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시험을 봐서 일찌감치 철도공무원이 됐다. 한때 고향 어등역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다.

▲어등역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사진제공: 장화식)

“경북선에 옛날에 예천을 기준으로 역이 많았어. 열 개도 넘었어. 영주에서 부터 방구, 미호, 어등, 미산, 노평, 동예천, 예천역. 사람도 많았고. 여기 어등에 5.16 나고 난 뒤에 기차역이 생겼지. 국토건설단 그 사람들이 와서 부역 다 하고. 역 공사하고 철로 공사, 공사를 한 몇 년 했어. 전부 다 건설단들 불러서 했어. 그 사람들이 철로 레일 깔고 길 닦고 하는 거 보며 학교 다녔지. 그때부터 기차 타는 일 하고 싶더라고.”

그가 철도관사에 사는 것도 철도에 대한 애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내가 전에 철도 근무할 때도 잠깐 관사에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어. 관사에 산 지 30년 넘었어요. 불하받은 게 아니고 세를 주고 사는 거지. 영주지방철도청 소유지. 일 년 세가 한 삼십만 원 정도 나가요. 관사건물하고 땅 하고 전부 다 한 천 평 가까이 될 거예요. 이게 뭔지 알아요? 이게 기차 객차 연결하는 신호기예요. 역무원들이 밤에만 사용하는 건데, 객차 칸을 뗐다 붙였다 할 때 들고 신호하는 거예요. 또 한 가지 보여줄 게 있어요. 내 정복 어디 있노? 다 없애부랬나?”

“없어, 다 없애부랬어.”

지난번에도 누가 어등역 관련 책 쓴다고 왔다 가고, 또 테레비에 나온다고 어디서 왔다 가고 사람들이 열 번도 더 우리 집에 왔다갔는데 또 찾아온 사람을 들였느냐고 철도 사랑이 넘치는 남편에게 한 소리를 하는 부인 강경분은 유천면 가동이 친정이고 어등교회를 다닌 지는 7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여기 있네 뭐. 이게 내가 입던 철도공무원 정복이에요.”

부인의 타박에도 기어이 제복을 가져와 보여주는 것을 보니 누가 찾아와 물어보면 집으로 데려와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안내해 준 이력이 좀 있는 모양새다. 제 3자가 봐도 괜시리 타박이 아닌 눈치다.

▲객차신호기를 들고 설명하는 장화식 씨.

“내가 옥천초등 3회 졸업인데 동네서 걸어서 20리 길이었어. 우리 다닐 때는 학생이 많아서 교가에도 600명 건아들이라고 했어요. 혼인할 때 우리는 저사람 친정 동네 가동서 1년 살다 묵어서 묵신행 했지. 그때 어지간한 집에서는 묵신행 못 해. 사는 형편이 돼야 하지. 우리 어릴 때는 여기 우리 이웃에 촌에 밥 굶는 사람들도 많았어. 어등역이 생기고 사람들이 들어왔지. 박정희 대통령이 그때 초가집도 기와집 만들고 통일벼 해서 민생고도 해결하고 그때부터 먹고 살기 조금 나아졌지. 밥 굶는 사람도 없어졌으니까. 그 시절이 참 어려운 시절이었어.”

▲진양 마을에서 내려다본 독양 1리. 붉은재와 독죽이 보인다.

그 시절 이야기 끝에 따라붙곤 하는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기억들과 흔적들은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사셨고 겪었던 분들에게 이렇게나 깊게 각인되어 있다. 좀 사는 집이었던 덕에 초년에는 고생을 덜했다는 장화식씨는 어른들 다 돌아가시고 평장개에 있던 집도 다 무너지고 난 뒤에 지금 마을로 아주 옮겨와 살고 있다. 어등역을 기차가 통과하는 시간이며 운행 횟수를 훤히 꿰고 있다. 기차선로를 따라 독양리 일대를 하도 많이 오르내려 마을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진양마을 입구의 열부비는 장화식씨가 아니었으면 쉬이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뻔 했다.

▲진양마을 입구 앙고개에 세워진 열부비

향산 아래 마을 진양의 열부비

진양은 예로부터 들이 넓고 산과 들이 향기롭다는 향산 아래 마을이다. 학가산 속 돌머리에 생겼다고 안현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열차가 지나가는 마을 입구에 열부비가 있다. 예천군지에 의하면 가난한 부부가 앙고개 아래 살았는데 부인이 앞 못 보는 남편을 돌보며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자신의 젖을 먹여가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는데 그 남편이 부인 젖을 잡고 살다 죽으니 그 아내가 젖을 잘라 무덤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여기 이게 열부비에요. 여기 이렇게 무관심하게 방치하다시피 돼 있어요. 내가 어릴 때 옛날에는 여기 지붕을 만들어 정자를 지어 놓았는데 그것도 다 무너져 내려버리고 비석만 10여 년 전에 이 자리로 옮겨놓았는데 문화재로 지정도 안 돼 있고 전설을 받침해 줄 증거물이나 기록이 없다고 관리를 안 하더라고요. 이러다 없어져 버릴까봐 안타깝죠.”

열부비를 뒤로 하고 돌아 나오는데 기차 차단기가 내려가고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이어 기차가 길게 궤적을 그리며 마을 앞을 지나간다.

“저렇게 차단기가 내려가고 자동적으로 신호소리가 나지. 차단기 내리는 것도 신호 소리도 옛날에는 사람이 돌렸지. 간수라고. 지금은 다 자동이지. 저게 부산 가는 여객열차인데 이제는 다 자동으로 올라가요. 사람이 필요가 없으니까.”

어등경로당 노인회 대장과 경로당을 지키는 할아버지들

어등역에서 철길 쪽으로 건너지 않고 대합실을 나오면 차표 팔고 군것질 거리도 팔던 식당 이 보이고 식당 모퉁이를 돌면 어등철공소가 있고 그리고 역이 바로 보이는 곳에 어등경로당이 있다. 어등경로당은 여러모로 좀 특별한 경로당이다. 40년도 더 전에 만들어져 예천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치 역사가 오래 되었는데다가 독양리, 옥천리, 기곡리의 다섯 동네 노인들이 모여서 만든 경로당으로 당시의 노인회를 만든 사람들과 과정이 기록된 ‘노인회 대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노인회장인 권영옥 할아버지의 선친 권태조가 처음 노인회를 만든 장본인이다.

▲어등경로당의 어르신들. 왼쪽 첫번째가 권영옥 어등경로당 노인회장이다.

어등역 개통했을 때가 열일곱 살 때였다는 권영옥 할아버지(81)는 기차역 생기고 다른 친구들은 다들 구경 갔다는데 본인은 그때 기차 구경 간 기억이 없다고 했다. 1939년생으로 부인 김복희와 스물, 스물 하나에 혼인을 했다. 아내의 친정이 감천면 진평리인데 집안사람들이 진평에 많이 살아 부친이 오가며 보시고는 처녀애가 괜찮다며 말을 넣어 혼사가 성사되었다고 한다. 학교는 일제 때부터 있던 가까운 옥천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일제 식민지 막바지에 학교를 다녀 일어는 쪼매 배우다 말았고 학교를 많이 못 다녀 글이 짧다는 할아버지는 부친이 만든 어등경로당 노인회 회원대장을 보물처럼 여기며 간직하고 있다.

▲어등노인회 회원 명부. 본향, 출생연도, 본적 등 당시 회원들의 명부가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일이 번호를 붙여가며 기록을 했는데 맨 뒷장을 보니 200번을 넘어간다. 중간에 실수로 빠진 번호를 감안해도 한 200여 명이 되는 숫자다. 서로 모여 세상 이치를 논한다고 어등경로당을 다른 이름으로 학구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등노인회 회원명부. 제일 윗칸에 적힌 1908년생 '회장 권태조'가 권영옥 회장의 부친이다.

위의 명부와 대장으로 미루어보면 당시 독양리와 옥천리, 기곡리만 합쳐 노인 인구가 이 정도 되었다는 말로 당시 마을 규모가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른들만 해도 그래 많았으니까요. 우리 어른이 일일이 사람들 설득해서 당시 시골마을에는 경로당이 거의 없을 때 사람들 모으고 회비 만원씩 걷고 해서 어등경로당을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부친이 일일이 한문으로 손수 다 작성하셨어. 부친이 한문도 많이 아시고 필체도 좋으셨지. 촌 단위로는 노인회를 그 시대에 큰 골 한 두 곳 빼고 이렇게 한 곳이 거의 없어요.”

▲평장개의 정인섭 할아버지와 막실 장세영 할아버지

독양2리 막실에 산다는 장세영 할아버지는 올해 86세로 감천면 석남이 친정인 부인 권정희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아 농사 지어 키워 시집장가 다 보냈으니 이제 할 일을 다 한 셈이라 한다.

“어등 우리 동네 앞을 보다시피 옥개천이 흐르는데 여는 물가래도 따로 나루터나 배도 없었고 그냥 물이 불었다가도 한나절만 지나면 다 빠지고 했어. 요새는 옥개천 중간에 여 보면 섬처럼 쌓인 데가 많은데 그때는 온통 다 모래땅이라 물이 금방 빠졌지. 고운 모래가 많아 놀기도 좋았고 하천부지가 내 논 옆에 있어 농사지을 때 한테 뚜드려 넣어 같이 농사도 지어 먹었지. 그전에는 비만 많이 오면 둑이 넘치고 했는데 이제는 옥개천 섶으로 제방을 해놨지. 여는 옛날부터 개천도 흐르고 논이 더배기라 다 벼농사랬지.”

농사지어 먹고 사는 농부가 기차역 생겼다고 딱히 사는 게 달라진 건 없고 그전에는 몇 십 리길을 지게에 지고 고개 넘어 팔러 가고 하던 것을 더러 열차 덕을 보기도 하고 자식들이 기차 타고 상급학교 다니고 한 기억이 다지만, 어등역이 생기고 사람이 많이 다니면서 그때는 활기가 돌았다고 기억한다.

“여기 어등역에 지금은 철로 보수하는 보선 직원들 그 사람들만 있고 차표 파는 사람도 없고 기차도 안 서고. 이제 기차 타려면 버스 타고 다시 예천역 가서 타야지. 경북선 여기 노선 중에 다른 역은 역사도 다 뜯어버렸어. 어등도 간이역이 돼서 사람은 안태우는데 그런데 영주역에서도 그렇고 점촌역이나 예천역에서도 그렇고 이제 여기 어등역에 침목 같은 거나 철도 자재 같은 짐을 여기 많이 갖다 놓더라고. 지금 그 보선 직원들도 여기도 상주하지는 않고 차로 왔다갔다 출퇴근을 하는 거 같더라고. 기차 설 때가 좋았지. 사람도 많고 장사도 잘 되고.”

▲한마음이 되어 면민체육대회에 참가했던 젊은 시절의 어등경로당 어르신들. (사진제공: 어등교회 정말숙)

1929년생인 정인섭 할아버지는 평장개서 나고 자라 지금껏 살아오셨다. 올해 90세로 앞에 9 자를 다셔서 그런지 나이를 여쭈니, 나이는 가르켜주기 아깝다 하고 혹시 초등학교를 다니셨나 물으니 학교를 댕겼으면 다문 면장이라도 할 텐데 못 댕겼다고 하신다. 무심코 초등학교 정도는 다니셨으려니 생각한 내 자신이 부끄워지는 순간이다. 할머니 가고 적적하기도 하고 해서 어등교회에 다닌 지 1년이 되었다는 정인섭 할아버지는 ‘자꾸 적으니 겁나니더!’ 하면서도 묻는 말에 대답을 곧잘 해주셨다.

“내 고향은 영주하고도 이산이야. 죽은 할마이도 영주 이산 사람, 나도 영주 사람 그런데 오다보니 여기까지 와서 만났지. 지금은 할마이도 없고 내사 혼자래. 장가는 갔으이 아들이야 있지.”

경북선 개통난 후에 어떻게 먹고 사셨느냐는 물음에도 거침없이 대답하신다.

“나는 그런 거는 별달리 말할 것도 없고 한 가지 이야기 하자면 그전에는 술 먹고 영주서부터 걸어다니다가 기차나오고 나서부터 기차 타고 다녔어. 한참 젊은 때는 걸어서 한 삼십분 걸렸지만 술을 좋아하니까 한 잔 하고 술 취하면 구부래지기도 하고 바로 오기도 하고 그래. 나는 기차 타고 다녀도 여까지 얼마 걸렸는지도 몰라. 먹으면 끝까지 놀다 끝장을 봐야 되지. 막차 타고 오는데 시간은 몰라. 독양2리 평장개에서 막실 가기 전 다릿발 옆이 우리 집이지.”

장날이면 막걸리 한 잔 걸치고 고단한 세상사 유행가 가사에 실어 달래며 고등어 한 손 사들고 들어오기도 했던 우리네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살아오신 모습이다.

어등경로당의 역사만큼이나 소속된 어르신들의 자부심도 크다.

“우리는 지금도 기곡1동하고 2동, 옥천동, 독양1동 하고 2동 이렇게 모여서 경로당을 하지. 다들 같은 학교 다니고 같은 장 보고 한 동네 같이 지냈지. 지금은 동네에 독양경로당이 따로 생겼고 기곡리에도 경로당이 있지만 우리는 지금도 ‘5’자가 들어가거나 겹치는 날이면 여기 경로당에 모여. 일 없고 심심하면 5일마다 모이기도 하고 5일, 15일, 25일 이렇게 열흘에 한 번 모이기도 하고. 오늘은 어떻게 하다 보이 면에 나가서 식사를 했어. 회원 중에 장병옥 어른이 92세로 나이가 많아 이제 딸네한테로 간다고 마지막으로 모여 점심도 먹고 술도 한 잔 했어. 오늘 해 빠질 때까지 화투치고 놀다 갈 판이래. 아쉬운 마음에 많이 취해 가지고 다들 이래 술냄새를 풍기고 있어. 술 한 잔 하고 누워 있는 저 어른이 기곡 사람이래.”

성함을 물으니 초면에 남의 이름은 어찌 묻느냐고 그런 거 못 가르쳐준다는 기곡 사는 무진생 임성수(91세) 할아버지다. 철도서 퇴직한 장화식에 대한 이야기도 환했다. 전화번호부를 펴 놓고 이장은 몇 번이고 부녀회장은 몇 번이라고 언질을 주기도 한다. 요즘 경로당이나 어르신들이 많은 농촌 가정에서 동리 전화번호부는 필수 배치 아이템이다.

“새로 바뀐 동장이 배동표래.”

“배동표 거가 누집 아들인고?”
“안형, 장화식이 번호가 없네.”

“여기 경로당 안 나온 지 꽤 됐지.”

“장화식 전화번호가 하필 빠져 있어.”

“어예 그사람 전화번호를 안 넣어 났을꼬?”

“어디 이북서 왔나 왜 그랬노?”

“장화식이가 철길 건너 저 너머 농협창고 앞 철도관사에 안 사나?”

“오늘도 또 어디 갔는지 모르지.”

서로 한 집 건너 누가 사는지 다 꿰고 계시면서도 때로는 모른 척도 하시고 마음이 내키면 일부러 찾아서도 가르쳐 주시는 어르신들이다.

소박한 믿음으로 지어진 어등교회

▲어등교회

어등경로당을 나와 몇 걸음 걷다보면 어등교회 앞이다. 어등교회는 처음 평장개에서 믿음에 눈을 뜬 거먹골 윤씨 할머니 집에 모여 예배를 보다가 진양으로 예배당을 옮겨갔다가 30여 년 전인 80년대 초반에 지금의 터에 동네 교인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태 함께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예배당을 둘러보고 교회 옆 김동인 장로 댁 문을 두드리는데 안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춘 찬송가 소리가 들려온다.

김장로는 점심 먹자마자 들일을 가고 없어 반주 연습을 하다 문을 열어준 부인 정말숙에게 김동인 장로와 어등교회를 지키며 살게 된 내력을 들었다. 현재 어등교회 예배를 보고 있는 김동인 장로는 1948년생으로 독양리가 고향이다. 부인 정말숙은 예천 지보면 상락마을이 친정으로 안동 성경학교를 다닐 때 알게 된 분의 소개로 혼인을 했다.

▲진양에서 옮겨 신도들이 함께 지어 올린 어등교회. 지붕 위 어린 학생들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제공; 정말숙)

▲쇠실 집 처마 앞에 선 김동인 장로의 모친 권봉이 여사 (사진제공: 정말숙)

“안동에서 성경학교를 다녔는데 교회 어른들이 양쪽에서 중매를 했어요. 믿음이 같으니까 아무래도 그게 인연이 돼서 결혼 했지요. 장로님이 시어머님 따라서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직장 그만두고 난 뒤부터 공부를 더해서 장로 임직을 했을 때 시어머님이 정말 좋아하셨지요. 돌아가신 지 14년 정도 됐네요. 다른 교회서도 사목하다가 고향인 어등교회로 들어왔어요. 지금은 교회에 목사님이 안 계시고 우리 장로님이 예배를 보고 있지요.”

▲1965년 12월 31일, 중학교 졸업을 앞둔 김동인 장로 (사진제공: 정말숙)

고향 사람인 김동인 장로가 들어와 예배를 보다보니 시골마을 어등교회는 주일이면 이 골 저 골 흩어져 사는 독양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예배도 보고 서로 안부도 나누는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었다.

▲어등교회 김동인 장로가 여섯 살 때 제일 큰 누님과 함께

▲1965년 안동에서 성경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정말숙. 왼쪽에 앉은 이.(사진제공: 정말숙)

▲1970년 9월, 36사단 신병대 6중대 16기 입소기념 (사진제공: 정말숙)

▲1974년 봄, 독양리 사람들과 의림지로 나들이 간 김동인, 정말숙 부부 (사진제공: 정말숙)
옥천초등학교와 소풍의 추억

▲폐교된 옥천초등학교

옛날부터 잘나가는 동네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기 마련이었다. 특히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법이라 집집마다 아이들이 올망졸망 자라는 마을 인근에는 그래서 학교가 꼭 있었다. 그중에서도 초등학교는 인근 마을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막강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 가까운 동네 아이들은 텃세라는 걸 부리기도 했었고, 같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나왔다는 것은 곧 고향과 추억을 공유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중학생 아들이 친구네 가족과 내성천에서 (사진제공: 막실 김분남)

옥천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한창 많을 때는 5~6백 명이 되었다고 한다. 감천초등학교 분교가 되었다가 페교가 되면서 지금은 개인에게 소유가 넘어갔다. 폐교가 색깔을 입혀 단장되어서 다른 문화공간으로 거듭난다니 나쁘지 않은 일인데 이제 크건 작건 웬만한 농촌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찾아보기 힘들게 된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전에는 어등역 근처에 옥천초등학교, 미호에 보문초등학교, 수계에도 초등학교가 있어 보문에만 학교가 3개나 됐었는데 다 페교가 되고, 그나마 인근에 감천초등학교가 학생이 몇 안 되어도 아직 남아있어 다행이라는 어르신들은 묻지 않는데도 젊은 사람이 적어 큰일이라고 마을 걱정을 한다.

▲올해 61세인 큰 누이의 감천중학교 소풍 사진. (사진제공: 장민철)

“지금 다 나가고 젊은 사람이 별로 없어요. 객지 갔다 들어와서 농사짓는 사람 중에 50대, 60대는 한 둘 더러 있어요. 그래도 손주 키워주는 집도 있고 독죽에 그 아들네가 물려받아 하는 정미소집도 있고 고등학생도 있고 어린 애들이 감천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몇 명 있어요. 그런데 도청 들어오면서 그나마도 그쪽 학교로 전학 간다고 하대요. 우리 동네는 덜하지만 옆 동네나 예천 읍내 이야기 들어보면 젊은 사람들이 도청 쪽으로 많이들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동네에 젊은 사람들하고 애들이 있으면 아무래도 낫지요.”

▲1966년 1월 어등교회 김동인 장로의 감천중학교 졸업 기념사진 (사진제공: 정말숙)

독죽마을 정미소와 경로당에서 만난 할머니들

▲최춘택 독양정미소

고려 유신 배상지가 절개를 굽힐 수 없다 하여 대나무를 심고 들어와 살았던 독죽마을은 독양리에서도 마을이 넓고 가구 수가 많은 곳으로 큰 도로가 지나는 마을 입구에 독양정미소가 있어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알고보니 고등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있다는 그 집이다. 독양정미소라는 간판 아래 최춘택이라고 이름이 적혀 있어 독양리 일대에서 최춘택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지금도 통한다. 기척 없는 정미소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왼쪽에 더운 한낮에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담배를 건조하는 중인지 열려있는 담배굴이 보인다. 후끈한 열기가 나는 담배굴을 뒤로 하고 돌아서니 더 갈 것도 없이 독죽경로당 앞이다. 동네가 조용하다 했는데 경로당 문을 여니 할머니들이 모여서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며 쉬고 있다. 다들 오전에 조금 전 본 담배굴에 담배를 엮어 매다는 일을 하고 고되서 점심 먹고 한잠 자기도 하고 쉬려는 참이었지만 손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다고 들어오라고 한다.

정미소 간판에 최춘택이라고 이름이 적혀 있더라고 운을 떼는데 누워있던 할머니 중 한 분이 우리 영감 이름이라고 일어나신다. 흉년에도 밥은 안 굶는다는 정미소 집에 시집온 이박순(73세) 할머니다. 할머니가 가리키는 벽에 걸린 독죽경로당 개관식 때 찍은 사진 속에는 정미소를 일구어 놓고 먼저 간 최춘택 할아버지가 있었다.

“우리 양반이 정미소를 오래 해서 번 돈으로 마을 길 닦을 때도 땅을 내놓고 여기 독죽경로당 지은 땅도 먼저 간 우리 양반이 희사를 했어요. 여기 이 자리가 우리 땅이랬어요. 영감이 정미소를 하면서 돈 벌어가지고 동네를 위해서 좋은 일도 많이 했어요. 최춘택이 이름 걸고 정미소를 했잖니껴? 독양리 사람들은 그러이 우리 양반을 다 알았지요.”

▲독죽마을의 담배굴

사진 속에서는 최춘택 할아버지가 여전히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다. 최춘택 할아버지는 가셨지만 정미소를 아들이 들어와 이어서 지금도 하고 있는데 아버지 이름 석 자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 하고 있다. 실제로 최춘택이라는 이름 석 자를 걸고 정미소를 운영했던 할아버지를 내가 만났던 독양리의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독양정미소도 문을 닫게 되겠지만 그 날이 조금 더 늦게 왔으면 하고 바래본다. 아들이 아버지의 그 간판의 의미를 다시 잘 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독죽경로당 개관식.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최춘택

독죽경로당에서 목소리가 걸걸하고 크기로 소문난 안옥순 할머니는 친정이 통명으로 열아홉에 시집와서 60년이 넘어 이제는 친정 동네 살 적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고 한다.

"열차도 타고 다녔지만 우리 독죽 사람들은 감천장 많이 봤지. 걸으면 십리 길인데 옳은 길이 없었어. 동네 뒤 산길로 직골재 고개 넘어 다녔지. 나락, 서숙, 좁쌀 그런 거 이고 지고 다른 게 뭐 있니껴? 곡식 팔아서 그때는 꽁치가 흔해서 그걸 사서 짚으로 묶어서 들고 집에 와 보면 더러 빠주코 오고 그랬어. 칠남매를 뒀는데 근처에 옥천초등학교 뿐이라 다 거기 다녔지. 내 시집오고 한참 돼서 기차가 다녔어. 박정희 대통령 살아있을 때 박대통령이 개통식에 온다고 대통령 구경하러 갔어. 우리가 개통식 한다고 가서 태극기 흔들고 그랬지.”

박대통령 온다고 함께 태극기를 흔들었던 경주 월성 손가 손춘미(78세) 할머니는 어등역이 생기던 해 첫 아들을 낳았다.

“우리 첫째를 영주 장수면 친정에 가서 낳았는데 삼칠일 되자마자 시부모님이 아 보고 싶다고 빨리 데리고 오라고 해서 애를 들쳐 업고 왔는데 그때 어등역이 개통을 했어요. 사칠일 지나면 우리 친정아부지 생신이래서 그거 보고 오려고 했는데 조상되는 어른들이 손주 볼라고 오라고 못 살게 하잖니껴? 그때는 시어른이 하늘 같으니까 친정아부지 생신 못 보고 속상해도 왔지요. 그때 낳은 우리 큰 아가 철도공무원이 돼서 지금 장수역에 근무해요. 어른들이 기차소리 듣고 태어나더니 출세했다고 그래요. 내가 사십 여섯에 혼자 됐는데, 육남매 장남이다 보이 어매 고생한다고 맏이가 밑에 동생들 다 키우다시피 했어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장남 자리가 그렇게 무거웠니더. 잘 살아주니 고맙지요. ”

▲감천에 있는 예배당을 방문한 어등교회 장로님과 교인들. 사진 앞줄 노란저고리 한복 입은 이가 권영옥 할아버지의 부인 김복희, 그 옆에 최춘택 할아버지도 보이고 뒷줄에 독죽경로당 손춘미, 안옥순, 이실이 할머니 모습도 보인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김천이 친정인 ‘이실이’ 할머니는 어등역이 간이역이 되는 걸 제일 안타까워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전에는 기차 타면 한 번에 가던 김천 친정을 가려면 이제는 예천까지 버스로 가서 기차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데는 역 다 없애 뿌리는데 그래도 어등역은 안 없어지고 남아 있으니까 그게 우리마을 사람들한테는 추억이고 보물이래요. 우리가 전에 안동방송국 텔레비전에도 나왔는데 왜요? 그때 우리가 데모 했어요. 왜 데모했냐 하면 열차 다니게 해달라고 데모했어요.”

기차를 계속 다니게 해달라는 시골사람들의 항의는 철도당국의 경제논리 앞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게 뻔했지만 그래도 독양리를 비롯한 일대 주민들이 모여 한 번 탄원이라도 해본다고 생전 안 해본 데모라는 것을 해보았다고 한다. 1966년 역이 들어선 이래로 많을 때는 하루에 다섯 번도 정차하다가 하루에 세 번, 그러다가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2000년대 들어 상행선 하행선 하루에 두 번 정차하던 여객열차는 경제적 논리에 밀려 2007년에 적자가 큰 역들을 정리하게 되면서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이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하루 한 번 지나가는 여객열차를 비롯하여 화물열차가 지나다니고 역사 일부를 철로 수선을 하는 보선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으면서 어등역에 철로 보수 자재들을 보관하고 있어 다른 간이역에 비해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전국에 몇 개 남지 않은 간이역 중에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역사와 마을을 따라 곡선으로 휘어도는 기찻길을 만날 수 있어 기차마니아들이 입소문 따라 일부러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야기 끝에 1959년 경북 일대를 휩쓸고 간 사라호 태풍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결혼하고 난 뒤에 흉년이 져서 송구도 벗겨서 먹고 하던 시절도 있었어. 이박사(이승만 대통령) 살아 있을 땐데 태풍 와서 집도 떠내려 오고 소 돼지도 떠내려가고 그때가 신축년인가 그랬는데 여기 독죽은 피해가 덜했지만 저 아래 회관 있는 데하고 냇가 가까운 평장개 같은 데는 난리가 났지요.”

태풍 피해가 적었던 안옥순 할머니에 비해 손 할머니네는 같은 독죽에 살아도 폭 파인 안쪽에 집이 있어 태풍 때 집안까지 물이 들어와서 추석 명절 준비를 하다가 급하게 대피를 했다고 한다.

“물난리 날 때 우리가 저 아래 살았는데 태풍 때 우리 집에 물이 이만치 들어왔어. 지금 옥천에 가 있는 전화국이 그때 저 아래 회관 있는데 있었는데 거기에도 물이 들어오고. 우리 아가 집에 부친 책 하고 짐이 아직 풀지도 않았는데 다 젖어 부랬어. 물 들어오는데 우리 시어른은 나오라고 하는데도 안 나오고 물 퍼내고 있어서 우리 집 양반이 끌고나오고 했어요.”

그렇게 독죽경로당에서는 어등역과 마을, 마을사람 심지어 태풍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독양1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우리의 근대기행은 앙고개의 열부비 앞을 지나 독양보건소가 있는 평장개로 넘어간다.

- 독양2리의 평장개와 들미고개, 막실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안동시공동기획연재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fmtv.co.kr/news/view.php?idx=11961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관련기사
키위픽마켓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