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우리동네 - 예천군 천향리1]마을의 희로애락 함께 해온 터줏대감 석송령 - [안동시 공동기획 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11
  • 기사등록 2018-12-07 16:21:58
기사수정
아침해가 온 마을을 비추는 벼트리마을
700년 된 청년나무가 사는 마을

▲석송령 ⓒ이호민

부자나무가 있는 예천군 천향1리

“우리 어릴 때도 나무가 600년 됐다 켔는데, 안즉도 600년 이래. 내가 지금 나이가 벌써 일흔 살이 넘었는데.”

예천군 감천면 천향1리에 사는 김규탁(74) 씨의 말이다. 천향1리에서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을 꼽으라면 마을 주민들은 한그루의 나무를 맨 먼저 꼽을 것이다. 성은 ‘석이고’, 이름은 ‘송령’인 이 나무는 천향 1리의 자연촌락인 벼트리, 귀리, 돌밭, 샘밭, 진밭 등 5개 촌락 중 벼트리, 귀리, 돌밭(석평) 세 촌락의 성황당이다.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동신목으로서 부귀, 장수, 상록을 상징하는 반송이다. 예천에서 풍기 방향으로 1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94호로 지정됐다.
 
사람들에겐 일명 부자나무라고 알려져 있다. 가슴 높이의 줄기둘레가 4.2m, 키가 10m에 이르는 큰 소나무로 1982년 천연기념물(제294호)로 지정됐다.

석송령이 있는 천향리 석평 마을은 오향남에 조선 영조 8년(1732)에 진성이씨, 의성김씨, 안동권씨 3개 성이 마을을 개척할 때 수석이 아름답고 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어 ‘석평’ 또는 ‘석전’이라고 불렀다 한다. 석송령이 있는 마을 입구에는 마을회관, 천향보건소, 경로당 등 마을의 주요 건물들이 있다.

▲마을 노인회에서 노인회 기금마련을 위한 공동작업으로 묵은 밭에 괭이로 직접 밭을 일구는 모습.

“옛날에는 이 동네에 진성이씨가 많이 살았어요. 이 감천면 카는 데가 감천현이었는데, 안동부 소속이었어요. 예천군이 아니었어요. 여기 와 살던 사람들이 안동권씨, 진성이씨, 의성김씨였는데, 전부 안동에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지금도. 1914년도에 왜놈들이 행정구역 개편하면서 예천군으로 귀속됐어요.”

마을에서 700여년을 살아온 석송령은 실제로는 마을을 단합하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실제로 마을 주민들의 단합을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석송령 공동 돌보기를 비롯해 몇 백년간 이어져 온 석송령 계, 석송령 장학사업 등 마을 주민들은 작은 일에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던 옛 촌락의 정겨운 모습을 한 그루의 나무를 함께 돌보면서 이어오고 있다.

▲ 마을노인회에서 석송령에 제초작업하는 모습

그래서일까. 멀리서 보면 나무 한 그루가 마치 큰 산과 작은 산들로 구성된 산맥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산맥을 동그마니 마을 중앙에 옮겨 온 것 같은 형상이랄까. 나무 안에 가까이 들어가 보면 가지와 뿌리가 마치 여러 갈래의 길처럼 큰 산을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600여년이 훌쩍 넘었지만 노송의 느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석송령만의 확연한 특이점이다. 내년부터는 나이를 공식적으로 700년으로 바꾼다고 결정됐다. 나무 아래 서서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지금도 생장하며 힘차게 뻗어나가는 기세에 그만 압도당하고 마는데, 석송령이 ‘청년나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을 어른들이 서숙을 추수하다 새참을 먹는 모습

석송령이란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하지만 원래부터 이렇게 큰 나무는 아니었을 터. 석송령이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데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노인회관에서 만난 권영덕 이장, 석송령보존회의 김규탁 회장, 김성호(81) 노인회회장, 석송령보존회 이동섭(65) 총무를 만나 석송령에 대해 옛 이야기를 들었다.

“약 600여 년 전에 큰 홍수가 났을 때 풍기 지방에서 석관천을 따라 떠내려 오던 어린 소나무를 지나가던 나그네가 건져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고도 하고, 마을 주민이 건져서 심었다 캐요. 우리 마을에는 이런 전설이 없는데 다른 동네에서 이런 얘기가 전해 내려와요”

나무가 위치한 마을이 석평(石坪)이므로 ‘돌 석자를 따서 성으로 삼고, 영험 있는 신령스러온 소나무라고 해서 ’송령‘이라고 지었다.

석송령이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것은 이 마을에 살던 이수창 씨가 외아들 이수목 씨가 가출한 후 행방불명이 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자, 이수창 씨가 임종을 앞두고 본인 소유의 토지 6,600㎡를 소나무에게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뜻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이 토지를 팔거나 양도하지 않고 석송령 보호재산으로 존속시키기 위해 자연인처럼 이름을 지어 등기를 해두었다. 나무에 인격을 부여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일이어서 외국 방송사에서도 몇 차례 취재를 하러 오기도 했다.

▲ 석송령 내부 ⓒ이호민

석송령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김규탁 (74)씨가 당시 등기부등본을 펼치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등기를 1927년도에 했어요.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잖아요. 그때는 지금처럼 주민등록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인처럼 서류를 갖춰 내면 등기가 가능했어요. 그래서 성이 ‘석’씨고, 이름이 ‘송령’이라고 하니까 등기소에서는 그리 알지요 뭐. 그래 등기를 해놓으니까 나무가 자연인이 아니다보니 인감증명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영원히 소나무 재산이래. 기존에 등록돼 있는 권한을 뺏을 수 없잖아요. 소나무 앞으로 재산이 있는 건 세계적으로 저 나무 하나뿐이래요.”

지금은 1970년대 새마을사업과 함께 추진한 주변정비사업으로 집과 축사 등이 철거됐지만, 이전에는 여섯 채의 집과 축사가 석송령 토지 안에 있었다. 220근의 벼를 텃도지로 받아서 110근은 석송령 제수비용으로 쓰고, 110근은 토지를 잉여한 이수창씨의 묘사비용으로 같은 진성이씨 집안사람에게 주어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제사를 지내던 사람이 외지로 떠나자 2004년경부터 마을사람들이 이수창 씨의 산소에 벌초하고 묘사도 지낸다.

마을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석송령계

이 마을에선 오래전부터 석송령을 돌보기 위한 계를 조직해 왔다. 집집마다 가입비조로 성금을 내는데 정해진 금액은 없고 저마다 살림형편대로 냈다. 석송령 계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계문서 중 가장 오래된 문서는 1923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유일하다. 이 문서도 90년이 넘었다.

“처음 계를 시작했을 때가 몇 백 년 됐는지는 몰라도 아마 마을이 생기고부터 일거예요. 이건 서류이고, 내려오는 전래는 이게 뭐 석송령이 생긴 이래부터니까요.”

권영덕 이장의 말처럼 석송령은 마을의 역사와 언제나 그 뿌리를 함께 하고 있다. 그렇게 모인 기금으로 제수를 장만해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미리 선정된 제관 두 명이 목욕재계를 한 후 제사를 올린다. 제관은 그해 상이나 불행을 당한 일이 없는 사람 중에서 가려 뽑게 되는데, 이날은 온 동네가 장사진을 이룬다. 석송령 동신제는 단연 마을 최고의 행사이자, 예천의 대표적인 행사로까지 자리매김했다. 그날은 군수도 함께 자리에 참석한다.

▲석송령 동신제

동신
제를 올리는 축문에는 공동체의 안위와 평안의 내용이 담겨 있는데, 예전에는 축문을 한문으로 읽었다고 한다. 모두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점을 감안해 규탁 씨는 5년 전부터 순 한글로 바꾸어 낭독하고 있다. 마을 어른들의 반대도 일부 있었지만, 아름다운 전통은 고집하되 소통의 변화는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축문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물었다.

“지금까지 이런 복지를 만들어줘서 고맙고, 동네 농사 잘 되고 무병장수하게 해 달라, 학생들 공부 잘해서 우리나라에 유용한 인재가 되고, 객지에 나가 있는 이 동네 출신들 모두가 편안하게 해달라고 정성껏 빌죠.”

동신제가 끝난 다음 날엔 전 동민이 다 모여서 음복을 하고, 한 해 동안 추진할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윷놀이 등 대동회를 하는 것이 이 마을 사람들이라면 갖고 있는 공통의 기억이다.

▲석송령 동신제를 지내는 모습

마을 사람들 모두를 품고도 남는 그늘

석송령 그늘은 워낙 넓어 마을 사람들을 모두를 너끈히 품을 수 있었다, 그늘 면적만 약 1,000평방미터(324평)나 되는데, 국내에서도 이만한 나무 그늘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마을 사람들이 점심 자시고 거기 가서 쉬시다가 오후에 일하러 가기도 했어요.”

아이들에게는 가지 끝까지 타고 올라가 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를 내기하는 놀이터였다.

“거기 가지 끝까지 안 가본 사람들이 없죠. (웃음)”

토박이 김성호 씨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환히 웃는다.

“나뭇가지 옆으로 손 놓고 갈 수 있나 없나 그런 놀이도 하고 놀았죠.”

이동섭 씨도 나무의 품에서 개구쟁이 시절을 보냈다. 마을 주민들은 눈이 오면 나무 위에 내린 눈을 쓸어내릴 장대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가지하나 부러질 새라 노심초사했다. 울창한 나뭇가지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지지대를 마련하기 위해 나무기둥을 깎는 것도 모두 마을 주민들의 일이었다.

“당시엔 동네 사람들이 나무 목주를 놨어요. 목주할 나무를 베어 와서 썩은 것 교체하고, 전부 동민들이 했죠. 어른들이 풋구 음식 먹으면서 윷판도 벌이고.”

동섭 씨가 어릴 때는 이런 풍경이 흔했다고 한다. 나무를 중심으로 사람들은 모여서 쉬고, 노는 등 희로애락을 함께 한 것이다. 이런 마을 사람들의 나무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소나무 박사님이 와서 더 이상 지지대도 하지 말고, 자연 상태로 두라고 해요. (그동안) 마을 사람들은 나뭇가지 하나도 부러지면 안 되거든요.(웃음). 사람도 운동을 해야 근육이 강해지듯이 나무도 바람에 자연스럽게 흔들흔들 그래야 된다고…. 우리는 나무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신이라고 생각해요.”

석송령이 이렇듯 장구한 세월을 늘 푸른 나무로 그 위용을 갖추는 것은 나무를 소중히 아끼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 덕분이다.

▲새마을사업 당시 석송령에서 퇴비작업하는 모습

석송령에 얽힌 영험 있는 이야기들

마을 주민들이 석송령을 철저히 보호하고 정성껏 동제를 올리는 것은 비단 오랜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굵게 뻗은 가지만큼이나 녹록치 않은 역사의 고비를 넘어올 때 주민들은 이 나무가 언제나 마을의 안위를 지켜줬으며, 함께 했다고 말한다.

특히나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 당시 마을 사람들만이 경험했던 기적 같은 일들이 모두 석송령의 영험에서 비롯됐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 나무를 베어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 일본 군함의 재료로 활용하기 위해 일본순사가 인부를 동원해 나무를 베려고 톱과 장비를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석송령 부근의 개울을 건너오는데 갑자기 자전거 핸들이 뚝 부러져 순사는 목이 부러져 죽은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인부들은 영험스러운 이 나무를 보자 겁에 질려 벌목을 중단했다고 한다.

▲샘밭다리를 놓은 기념사진

또 6‧25사변 때는 인민군이 석송령 나무 밑을 야전병원 막사로 사용했는데, 당시 삼천초등학교를 비롯한 인근 모든 지역에는 비행기로 많은 폭격을 받아 피해를 보았으나 이 마을만은 어떤 피해도 받지 않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동섭 씨는 어릴 때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인민군들이 일사천리로 넘어오면서 예천전투를 많이 끌었어요. 예천을 점령 못해서 일주일 끌었다고. 삼천초등학교도 폭격을 맞아가지고 학교가 부서졌는데, 이 마을만은 괜찮았다고 어른들이 그래요. 이 위에 진평 1리에 가보면 보문면 삼성 마을도 그렇고, 한날 폭격을 해서 진평1리 가면 그날 죽은 사람이 30여명이나 되는데, 제사가 한날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어요. 거하고 여하고 우리 동네는 그 마을 전투를 여기서 벌였는데도 한 명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나무가 주는 장학금

석송령은 이 마을 출신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준다. 나무가 주는 장학금이라니. 말이 참 예쁘다. 1985년도 전두환 대통령이 석송령 보호기금 500만원을 하사했다. 마을에서는 기금을 유익하게 쓰기 위해 석송령장학회정관을 제정하고 기금을 은행에 예치해 발생하는 이자로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은행금리가 좋아 높은 이자가 발생해서 가능했다고 한다. 1986년부터 2003년까지 총 44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는데, 마을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차차 사라지면서 2004년 이후에는 지급이 중단됐다가 2014년도에 대학생 1명에게 장학금을 다시 지급했다.

▲서울 사는 전재원씨에게 석속령 액자를 선물한 마을주민들

서울에 사는 이 마을 출신 전재원 씨는 동네 행사를 할 때마다 잊지 않고 찬조를 보내곤 했는데, 이에 주민들은 석송령 사진을 액자에 넣어 감사함을 표하기도 했다. 석송령은 마을의 영원한 상징이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기억 속에서 언제나 푸르게 살아있다.

처음에는 나무에게 토지를 준다는 생각자체가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다. 취재를 하면서 나무를 대해온 마을 주민들의 경외심은 대단히 깊었다. 나무로 인해 받은 평안과 안위를 다시 나무에게 지극 정성으로 돌려주는 행위는 보기 드문 미풍양속이다. 나무에게 토지를 준다는 생각은 그저 어느 한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버지 대(代)로,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대(代)로 거슬러 올라가며 나무와 맺어온 이 마을 사람들만의 자연스러운 성정 같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도 이 전통이 보존되고 이어진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통도 계승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내 옛 이야기로만 남게 되니 말이다. 후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정성을 쏟는 한 석송령은 그 자리에서 언제나 푸르름을 자랑하며 마을의 평안을 줄 것이다.

옛날이야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벼트리마을

석평마을에서 삼천초등학교 방향으로 올라오면 벼트리 마을이 있다. 1750년경 예천임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된 이곳은 ‘귀’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이문이라고도 하고, 귀리라고도 불린다.

1932년경에 마을 주민인 김휘국, 이승우 등이 마을 지명을 다시 정리하면서 햇빛이 잘 비치는 양지바른 마을이라 해서 ‘벼트리’로 부르게 됐다고. 이동섭 씨의 할아버지는 이 마을 지명을 지은 이승우다.

“당시 할배가 우리 집에서 보면 집에서 아침 해가 뜨는데 온 마을을 훤히 다 비췄기 때문에 ‘벼트리’라고 지었다케요.”

할아버지는 석송령 계도 오랫동안 맡았고, 그의 아버지도 대를 이어 계를 이어받았다. 동섭씨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계문서를 마을에 인계했다. 8남매에 외동아들로 자란 그는 친구들이 모두 외지로 떠나고 혼자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현재는 석송령보존회 총무 일을 보고 있다. 3년간 천향1리 이장직도 맡았다.

▲ 천향노인회 정기총회

특히 혁신마을위원장을 맡아 천향1리의 발전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마을회관 앞에서 문화예술반상회를 열어 문화공연을 비롯한 옛마을사진전시회도 열었다. 마을 사람들 장롱에 꽁꽁 숨어있던 앨범에선 희귀한 사진들이 많이 나왔다. 새마을사업 때의 마을의 오랜 역사들이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현재 이곳에 삼천초등학교가 있는데 예천, 감천, 천향동, 천이 세 번 있어서 삼천이라고 부른다.

벼트리라는 공간 안에서도 지명은 다양하게 공존한다. 삼천초등학교 초입에 성지미골이 있다. “성스러운 짐(김)이 올라온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매서운 한겨울에도 샘이 얼지 않았으니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 김이 이곳 사람들에겐 성스럽게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이곳에 동섭씨의 집이 있다. 집에 들어서자 오래된 감나무에 새들 수십마리가 가을비를 맞으며 감을 쪼아먹다가 후루룩 날아다니며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부인 장혜옥(64세) 씨가 거실에서 미싱을 돌리다 시집왔을 때부터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은 우리집 양반이 밭으로 쓴다고 다 밀어버려서 그렇지. 그 샘이 풀숲 속에 있을 때는 겨울에도 안얼었어요. 겨울에도 가보면 안 얼고. 봄에 일찍 가면 도롱뇽 알도 있었고요. 거기 물이 지금은 찌짐찌짐 나와요.”

동섭 씨가 사는 지금 집터는 할아버지대부터 살아왔다. 그는 젊은 시절 2년 객지생활을 한 것 외에는 모두 이곳 고향집에서 살고 있다. 짧게나마 객지생활을 하게 된 데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고.

“장개 갈라고 2년 동안 객지 생활했죠. 당시 처녀들은 농사짓는 데는 시집 안 간다고 해가지고. 옛날에는 촌에 다 그랬어요.(웃음) 진짜래요.”

그렇게 중매로 지금의 부인 장혜옥 씨를 만나 1979년 12월에 결혼에 성공했다. 신혼여행으로 도산서원엘 다녀왔는데 혜옥 씨는 그게 신혼여행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갔다 오니까 그게 신혼여행이라 카대요. 요즘 같으면 누가 그래 시집오겠어요.”

하고 웃고 만다.

“요즘도 맹 그렇지만. 나는 장남이고, 외동이어서 굉장히 귀하게 컸죠. 옛날에 진짜 8남매에 딸이 일곱이고, 아들이 내 하나밖에 없으니까 귀케 컸죠.”

귀하게는 자랐는데 외동아들치고는 생떼 한번 쓰지 못할 정도로 가정교육은 엄했다고.

“우리는 아부지가 하도 무서워가지고 그래보지도 못했고. 아부지 들어오신다 그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웃음) 할배하고 겸상을 이래 하면은 할배 반찬을 내가 뺏아먹을까봐. 아부지가 따로 불러가지고 그 반찬을 못 먹게 했다고요. 그래가지고 고등어를 안 먹었어요. 맨날 반찬이 이래 오면은 범접을 못했어요. 할배하고 겸상을 하면서도 거기에다가 젓가락 아예 못가그로 했지요.”

▲마을에서 부역하던 주민들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모습

오래된 무쇠솥이 남긴 우화

동섭씨의 집터엔 아직도 옛 이야기들의 파편이 곳곳에 숨은 사연을 품고 묻혀있다. 무쇠솥도 그 중 하나인데, 한때 이곳에 상당한 부자들이 살았다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동섭 씨의 원래 초가집이 지어지기도 전의 이야기다. 우연히 부인 혜옥 씨가 발견했다.

“어느 날 소마구에 물을 주려고 땅밑에 호스를 깔려고 땅을 파다보니까 무쇠솥 요만한 게 하나 들어있더라고요. 다 삭은 게 나왔어요. 다리만 이래 있고, 뚜껑도 있고요. 옛날에 여기 부자가 살았다카대요. 근데 그 부자들이 망했는데, 왜 망했냐면은, 어른들 얘기로는 스님들이 시주오면 옛날에는 쌀 한바가지 퍼주고 그랬잖아요. 부자들이 스님이 그거 동냥하러 온다고 미워가지고 안주고 가라그이께네 그 스님이 시주 하기 싫거들랑 저 귀리 재를 틀어막아라 그랬대요. 저 귀리에 고개가 너머가요. 귀리에다가 흙을 떠부어가지고 거기를 막아라 그랬대요. 거기를 틀어막고나이께네 (그 후에) 동네가 폭삭 망해가지고. 다 떠나부고. 그래서 망할 때 부자들 재산이 거기 파묻혀 있었나봐요. 진짜 그런 살림살이가 나왔어요. 여기 그렇게 부자가 많이 살았다카대요. 우리는 모르는데…”

성지미골 바로 옆에 있는 귀리는 지형이 귀모양을 닮았는데, 스님의 그 말은 마을의 귓구멍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이야기 속 스님도 시주를 다니다 부자들의 인정머리 없는 행동에 기 막힌 일들이 참 많았던 모양이다. 이솝우화 같은 옛날 이야기가 마을의 지형과 얽혀서 마치 사실처럼 전해져 내려오니 말이다.

“한 300집 살았다 그래요. 골안에. 지금도 뒷밭에 가면 옛날 기왓장이 나와요.”

옛 이야기를 듣다가 무쇠솥이 궁금하여 두 부부를 따라 뒤안으로 가봤더니, 앙증맞게 생긴 무쇠솥 하나가 세월에 삭을대로 삭은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화려한 세월은 모두 지나갔다. 그래도 혜옥 씨는 얼어진 무쇠솥 조각을 하나 하나 맞춰가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보세요. 이 솥이 똥그란 게 얼마나 이뻐요. 예전에 여기 부자가 살았는 게 맞긴 맞나봐요. 나는 무쇠솥 요만한 게 나와서 정말 놀랬어. 엽전이라도 한 가득 묻어놨으면…”

하고 웃는다.

▲용문사 초간정에 화전놀이를 간 마을노인들

석관천에서 옛날엔 금을 캐

뒤안에서 옛이야기를 듣다가 동섭씨가 무쇠 솥 옆에 있는 녹슨 호미를 가리켰다. 이 호미도 마을의 호시절을 품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다.

“이게 호미가 굉장히 두껍잖아요. 옛날에 금 캐던 호미예요.”

동섭 씨의 말이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아마도 100년은 넘었다고 덧붙인다.

“이 동네에 여기 냇가(석관천)에 파면 금이 나왔어요. 지금도 금광이 있어요. 그 석송령 있는 골로 쭉 들어가면 금 캐내던 그 금광 굴이 있어요.”

혜옥 씨도 금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시집오니까요. 금을 진짜, 정말 눈곱만큼 요렇게 금을 싸가지고 보관을 해놨더라고요. 그 금을 그래가지고 이빨하는 금이라던가. 딱 요만큼을 종이에 싸가지고 있었는데. 이 집을 새로 지을 때 그 금을 잃었지 싶어.”

동섭 씨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옛날에 금이 도랑마다 사금이 많이 났어요. 석관천에서 옛날에 금을 캤죠. 금이 옛날에 샘밭 보 할 적에 석벽 내에서 냇물이 자갈이 흐르고 석벽하고 그 사이에 흙을 끌어모다가지고 금이 나와요. 마지막에 석벽 긁어낼 적에 사까래로 이래보이께네 나오더라고요. 일제때만 해도 금을 많이 채취했다 그래요. 이 석관천 냇물에 금이 엄청 많이 쌓여 있다는. 그래가지고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돈꼬지 카는 데는 포크레인 가지고 금을 채취를 했어. 포크레인으로 파가지고 물에다 흘려보내면 금은 남고. 금 방석이라는 게 있는데. 짚으로 두껍하게 이만치 매트형태로. 그걸 깔아놓고 물을 흘려보내. 자갈을 파가지고 그 물에다가 매트 위에다가 떠내려보내면은 돌은 내려가고 금은 무거워가지고 가라앉아 있어. 나중에 그 매트를 탁탁 털면 금이 나와. 어릴때는 집에도 그 매트가 있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을 먹고 가라는 부부의 말에 덥썩 그러겠다고 했다. 혜옥 씨가 내어주는 따뜻한 사골국에 묵은 김치, 호박 볶음으로 밥 한그릇을 뚝딱 말아먹었다. 직접 말린 연잎차로 목을 따뜻하게 축인 후, 동섭 씨와 함께 금광을 찾으러 민트리재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안동시공동기획연재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fmtv.co.kr/news/view.php?idx=120939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키위픽마켓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