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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예천군 보문면 독양리2> 어등역과 옥개천을 품고 살아온 동네
평장개, 막실, 들미고개 마을이 있는 독양2리 이야기
-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4)
  • 기사등록 2018-09-13 17: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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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과 햇볕을 안고 살아온 평장개 사람들

독양1리에서 독양교 다리를 건너 옥개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독양보건소가 보이고 개울 건너 아담한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지형이 평탄하고 햇볕이 잘 드는 마을 평장개다. 막실하고 더불어 인동장씨들의 세거지다. 옥개천이 마을을 끼고 돌고 있어 정자를 짓고 시를 읊었던 곳이지만 지대가 낮아 물가 마을이다보니 옛날부터 비 피해가 컸다고 한다. 독양리 중에서도 전국을 휩쓸고 갔던 사라호 태풍을 직격탄으로 제대로 맞은 곳이 평장개 마을이었다. 보건소 옆에 살고 있는 독양2리 장민철 이장은 평장개서 나고 자라 서울서 직장 다니다 부모님이 계신 평장개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네일을 맡고 있다. 장민철 이장은 평장개 살던 시절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사라호 태풍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평장개 주민들이 터를 제공하며 유치해서 지은 평장개의 랜드마크 독양보건소

“우리 평장개는 마을이 개울 바로 옆인데다 본래부터 지대가 낮다 보니까 1959년인가 사라호 태풍 때 마을에 집들이 몽땅 다 떠내려갔어요. 지금 엄마가 살고 있는 우리 집도 떠내려가서 그때 다시 지은 거예요. 할아버지가 글을 하셔서 사람들도 많이 오시고 우리 집에 동네 사람들하고 찍은 사진이 많았는데 물 들 때 다 떠내려가 버리고 못쓰게 됐어요.”

▲새댁 시절의 오화자. 숯을 달궈서 고대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 오화자)

태풍이 지나가고 집 지으라고 보상이 나왔다. 어른들에게 듣기로 당시에 면에서 수재의연금 명목으로 일부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턱도 없이 모자랐고 재건비용으로 준 보상금은 집을 전부 다시 짓기에는 부족했다. 장민철 이장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열일곱 여덟 가구가 살았고 학생만 동네에 50명이 넘었던 동네였던 평장개는 지금은 8가구가 살고 있다.

▲수몰되기 전 옛집에서 오화자와 어린 남매. (사진제공: 오화자)

▲평장개 장씨 정자 옆에서 동서랑 찍은 사진. 왼쪽에 장씨네 정자가 있고 뒤로 보이는 나무에 그네를 매어 타기도 했다. (사진제공: 오화자)

“옛날 우리 집이 좋았어요. 사는 형편도 괜찮았고 그때 초가지붕을 기와로 새로 이어서 집을 고쳐 지은 지 얼마 안 됐을 거예요. 그 집에서 6.25때 인민군들이 머물면서 부상병들 진료소 겸 사무소로 쓰면서 살았는데 북으로 갈 때 대장이 집하고 마을을 다 불태우고 가자는 걸 그 부대장인가 하는 사람이 성이 장씨였는데 여기가 장씨들이 사는 동네고 우리 어른들이 인품이 있는데다 장씨라는 걸 알아서 불태우지 말라고 해서 그냥 갔다고 하더라고요. 태풍 왔을 때 다른 집들도 떠내려가서 보상 받아서 그때 동네서 집 새로 많이 지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다 허물어져 버리고 이제 없지요. 이 집이 그때 새로 지은 집인데 그 후에 일부는 또 수리를 해서 새로 지었지요. 그런데 사람이 다 떠나 뿌이께네. 우리 창고 바로 밑에 집 원채가 그때 지은 집이래요. 앞집도 윗대 어른들은 다 돌아가셨죠. 예전에는 강변이 다 모래고 물도 참 맑고 좋았어요. 지금은 풀만 가득하고 물도 안 깨끗하고 못 써. 사람도 다 나가고 노인들만 남고. 그래도 우리 아들이 이래 들어와서 동네 일 하고 문중 일 하니 좀 낫지요.”

장민철 이장의 모친 오화자는 열여덟에 영주 장수면 사일에서 시집을 와서 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았다. 60년이 훨씬 넘은 예전 새댁 때 모습을 보니 그 시절이 어제인양 생생하다고 한다.

“옛날 우리 때는 이 고대 머리 할 때 불로 했어. 숯을 달궈서 지져서 그래 했어. 단오 때면 일하는 일꾼들이 짚을 가지고 새끼줄을 꽈서 그네 메고 그랬지.”

옛날에는 평장개 뒷산이 터도 널찍하고 소나무 숲이 좋아서 옥산초등학교 애들이 소풍도 참 많이 오고 단오면 그네 매고 그랬는데 산 주인이 소나무를 다 베어 팔아버린 후로는 그 좋던 풍광은 간 곳이 없고 잡풀만 가득한 산이 되어버렸다. 소나무 숲이 베어져 나가듯 사람도 가고 뒷산도 강변도 옛 정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조부 장성태와 작은 할아버지 (사진제공: 장민철)

조부 장성태는 한학에 조예가 깊고 의리가 깊기로 인근에서 알아주는 분이었다고 기억한다. 꼼꼼하신 성품이셨다는 말을 증명하듯 문집을 일일이 필사를 해서 책으로 묶어서 공부를 한 흔적이 고대로 남아 있고 문중 정자 관련 문서들도 보인다.

“할아버지가 초필이라고 가는 필체를 참 잘 쓰셨어요. 겉표지를 두껍게 한다고 쓴 것을 두겹으로 만드셨어요. 어릴 때 아침에 일어나면 사랑에서 할아버님 글 읽는 소리가 들렸죠.”

집안에 손님이 많아서 밥을 식구끼리만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는 아들의 말에 모친이 손님 상 차려 내느라 마음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에 손님이 많이 오셨어요. 어른들 대접하야 하니까 뭐라도 해서 올려야 하니까 없는 살림에 손님 오시면 신경이 많이 쓰였지요. 글하는 어른들 모여 앉으셔서 내가 밥해 드리느라고 정지에 있으면 놀러 오신 어른들이 사랑에서 책 읽으시는 소리 들리고 그랬지요.”

어른들이 누구 온다고 기별을 미리 하시는 것도 아니고 일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치면 마음은 바쁘고 대접할 것은 없어 혼자 발을 동동거리기도 부지기수였다.

“부엌에 된장 끓이려고 올려놓고 부지깽이 하나 다 쳐대기도 하고. 지금은 시숙이 어려운 게 있니껴? 같이 한 상에 먹어도 되고. 그때는 다 한 분 한 분 딴 상 차림이지. 우리 어른이 마음새가 그래 고우셨어요. 손님도 한 상이지만 거지도 한 상 줘야 되고. 농사일도 많았고 밀농사를 지어서 밀가루 빻아 와서 국수도 참 많이 밀었어요. 대를 이어 이제는 우리 아들이 저래 마을 이장일도 맡아하고 문중 일도 보네요.”

고생은 했지만 지나고 보니 어른들 모시고 살던 그 시절이 사람 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지금은 농사일도 안 하고 어른들 끼니 걱정도 안 하고 편치만 사는 게 심심타고 웃으신다.

▲조부가 늘 벽에 걸어두고 출타할 때면 의관을 정제하고 쓰시던 갓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조부가 쓰시던 갓이 아직도 갓통에 그대로 남아 있다. 누가 와서 팔라 해도 안 팔고 어른들 살다 간 흔적을 간직해 왔다.

“할아버님 갓도 우리는 하나도 안태우고 떨어져도 떨어진 그대로 고대로 남겨뒀어요. 시아버지 도포도 안 버리고 그대로 뒀어. 그대로 삭아 없어질 때까지 둘 거예요. 병풍이랑 지팡이는 들에 가고 없을 때 누가 가져가 버렸어. 다른 집은 골동품 다 팔아버렸어. 놋그릇이고 골동품이고 사러 많이 와요.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안 팔고 놋그릇은 딸들 하나씩 주고 고대로 남겨뒀어요. 나한테는 다 귀한 거지요. 병풍을 집에 처마에 싸서 높이 달아 놓았는데 누가 몰래 가져가버렸어요. 들에 일하러 가고 집 비우는 일이 시골에는 많으니까 잃어버렸죠.”

▲조부 장성태가 서원 향사를 앞두고 문중 내력을 필사한 글

부친 장안홍(78세)은 감천중학교와 안동고를 졸업했다. 영주하고 독양이 접해있다 보니까 이웃 동네 간에 혼인이 옛날부터 많았다고 한다. 이 동네 넘으면 영주 문수면 조재리, 대양리로 이어진다. 길이 이어지고 장이 서고 사람들이 오가는 참에 혼인말도 자연스레 건네어지게 마련, 장터에서 말이 나 혼인 맺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은 자고로 큰 데로 보내라는 말을 믿은 조부와 부친 덕에 민철씨는 어릴 때 서울로 올라가서 초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녔다고 한다. 형제가 6남매인데 위로 누님이 있지만 집안의 장손이라 고향 내려와서 동네일은 물론이고 자연 문중 일도 맡아하게 되었다.

▲조부상을 치르고 난후의 조모(앞줄 왼쪽)와 친지들 (사진제공: 장민철)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이 일을 맡아 하는 게 맞지요. 막실 두운정에도 문중 일 있을 때마다 가지요. 며칠 전에는 면에 갔더니 우리 마을에 올해 새로 우씨 성 가진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분이 있다고 그분이 살았던 집을 찾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열심히 수소문을 하고 있어요. 평장개 바로 건너 보이는 거묵골에 있는 의병장 윤국범 독립운동기념비 하고 새로 선정된 독양리 독립유공자 생가터 하고 묶어서 마을 테마길도 만들고 하면 마을을 알리기에도 좋고 좀 활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왕 맡은 거 저는 뭐 하나라도 더 해서 동네를 살리고 싶은 거죠.”

독양보건소가 지금의 자리에 새로 자리를 잡은 것도 장민철 이장이 활기가 없이 죽어가는 평장개 마을을 살리기 위해서 마을사람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어등교회 옆에 보건소가 있었는데 낡고 좁아서 새로 지어야 하는데 그만한 터가 있어야 되니까 주민들이 십시일반 집집마다 얼마씩 돈을 내야 됐어요. 그런데 다른 동네는 터도 마땅찮고 돈도 부담된다고 안하겠다 하는 걸 우리마을 사람들은 다들 한마음이 돼서 우리가 땅 제공하고 돈도 각출해서 부담하겠다 해서 마을 사람들이 터를 기부체납해서 독양보건소가 우리 평장개로 오게 된 거예요. 평장개에는 사람도 적고 아무 것도 없었는데 보건소가 생기니까 사람들이 이 앞으로 오가고 좋지요. 보건소 하면 이제 평장개를 떠올리니까요.”

독양보건소는 말하자면 미래의 평장개 플랜를 위한 장민철 이장의 빅픽처의 출발인 셈이다.

▲기우제를 지내던 남방산 산자락에서 내려다본 막실 전경으로 멀리 도로 아래가 평장개다.

재미지게 사는 막실 경로당 할머니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막다른 곳에 자리잡은 막실은 난을 피해 들어온 평해 황씨가 다래덩굴을 걷고 개척한 터에 장씨들이 들어와 함께 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인동 장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었다. 지금도 마을에 장씨 성 말고 다른 성을 가진 집이 들어온 이가 없다고 경로당 할머니들이 입을 모은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온 동네가 다 집안간이고 인척이라는 말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열일곱 열여덟에 시집와 오륙십 년을 장씨 집안 며느리로 살아온 할머니들이다.

시집 온 그해 철길이 놓여 기억이 생생하다는 전순화(72)는 66년도 어등역이 생겼을 당시 처음 요금이 30원이었다고 기억한다. 기차도 낮차는 기관실이 붙은 기차머리가 없이 동차만 운행하는 2칸짜리 기동차였다고 한다. 영주 이산이 친정인데 동차 타고 해산하러 갔다.

“나는 기차 하니까 낮에 동차 타고 친정에 해산하러 간 기억이 나니더. 열차가 하도 복잡해 배부른 새댁 몸으로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어 애를 태우자 역무원이 밀어줘서 간신히 승차해서 3시 차를 탔는데 컴컴한 밤에 친정에 부른 배를 안고 도착했다니까요.”

▲막실 큰집조카 결혼식으로 막실 경로당 할머니들 젊을 때 모습도 보인다. 김분남 할머니는 잔치 음식을 하느라 사진을 찍으러 가지 못했다. (사진제공: 김분남)

영주 문수면에서도 더 들어가는 삼계 새거리가 친정인 박춘자 할머니(77)는 기차에 사람이 하도 많아 역에 못내리고 한 정거장을 더 가기도 했다.

“나는 장에 갔다 오는데 워낙 사람이 미어터지니까 어등역을 그냥 지나쳤어. 내가 발을 동동 구르니까 어떤 아지매가 다음 역 가서 다시 올라오면 된다고 해. 그래 다음역인 일방역에 내려 올라오는 기차를 타려는데 그것도 또 복잡해 못 타고 날이 저물어 걸어서 근처 마을 강실댁이라고 아는 집에 갔는데 그 집이 비었어. 마침 옆집할머니가 사정을 듣고는 재워줘서 그 집서 자고 아침 일찍 올라오기도 했어.”

강월도 영월 주천선 공순원마을서 시집온 장화연(78세) 할매가 경북선 기차길 따라 골골이 그 시절 고생하며 살아온 아낙네들 사연을 어등역에 근무했다는 역무원이 했다는 말로 대신한다.

“역무원들이 애 안고 보따리 이고 지고 비좁은 열차를 타고 나물 팔러 다니고 하는 거 보고 우리보고 그러더라고요. 경북선에 딸 주지 말라고 해야겠다고요. 사람은 많고 기차는 비좁고 나물팔러는 가야겠고 그때 젊은 새댁들일 때라 무조건 밀고 들어갈 수도 없고.”

막실경로당 최고령 대장인 이부득(84세) 할매는 큰집 어른답게 문중 일이며 마을 돌아가는 내력을 줄줄이 꿰고 있다. 젊은 사람이 적어 걱정이라는 할머니는 젊은이가 간혹 눈에 띄면 못도 박아 달라 하고 전기제품도 손봐달라고 불러들인다. 다들 부득 할매가 날 때부터 지켜봐온 집안 젊은이들이라 거리낌이 없다. 일을 시킨 후에는 먹을 거며 농사지은 거며 챙겨주는 것도 스스럼이 없고 자연스럽다.

“우리 동네가 워낙 산골이라 우체국 배달부도 길이 멀고 하다 보이 날 저물면 마을에서 자고 가기도 예사였지요. 그만큼 오지였지만 다들 집안간이라 똘똘 뭉쳐 인정 있게 살았지요. 그전에 60가구 넘게 살 때는 마을에 힘쓰는 남정네도 많고 여자들도 일손이 많으니 무슨 일이든 뚝딱 해치우고 했어요. 지금은 마을에 있는 젊은 사람이래야 64세, 66세 되는 이가 있고 그 아래 젊은 아랫대는 돈 벌고 애들 공부 때문에도 다들 나가고 없지. 마을버스가 하루 네 번 다니는데 우리는 저 아래 평장개까지 나가서 타야되니까 걸어가거나 전동기 타고 가야지. 한때는 60호 넘는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막실에 다 해서 30가구 정도 되나? 집이 반으로 줄었어. 우리는 인동 장씨 외성 집성촌이라 다들 집안이고 따지고 보면 촌수가 멀지 않은 친척 간이지. 인정 좋고 시집들이야 잘 왔지.”

▲막실 인동 장씨 집안으로 시집온 장씨네 며느리들의 나들이 (사진제공: 김분남)

요즘도 마을 위쪽 인동 장씨 문중 정자인 두운정에서 제를 지내고 문중 모임을 가진다. 문중 제사는 매년 날을 잡아 육조에 삼일 간에 걸쳐 제사를 드린다. 집에 우환이 없는 이 중 두 사람이 유사를 맡아 준비를 한다. 독양리에는 막실 두운정 외에도 인동 장씨 정자가 두 군데 더 있다. 평장개 옥개천 강변에 위치한 계옹정과 평장개 마을 안에 있는 장씨 집안 개인 정자가 있다. 물가에 터를 잡고 누각을 지어 시도 짓고 정취를 즐기던 장씨 문중의 역사를 남아있는 정자들이 대신 말해주고 있다.

김분남 할머니의 나물보따리

울진 죽변이 친정인 김분남(72세) 할머니는 기차 생기고 아들을 영주로 진학시켰다.

“아~들이 마카 초등학교는 옥천으로 걸어다니다가 어등역 생기고 우리 아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는 영주로 기차 타고 통학 했어. 우리 아들이 아침 7시 기차 타고 갔다가 오후 5시 반 기차 타고 오는데 통학 기차 요금 350원 해서 왕복 700원, 군것질거리까지 하루1000원씩 쥐어 줬어.

▲영주역 풍경으로 영주장을 보기 위해 기차에서 내린 나물보따리와 함께 예천 김천 방면 하행선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사진제공: 정말숙)

“나는 주로 12시 기차, 3시 기차, 5시 30분 기차. 쪽파며 콩, 대파, 열무, 호박, 풋고추 따서 나물보따리 만들어 이고 기차 타고 영주장 가서 팔았지. 나물 팔아 애들 도시락 반찬꺼리 쥐포, 김, 계란, 소시지 같은 것들 조금 사고 나머지는 돈했지요. 영주 신역 앞에 번개시장이 섰어. 나물을 5~6일 팔면 일주일에 그때 6만원에서 7만원 돈을 장만 했어.”

김분남에게 기차는 나물 팔아 돈 벌게 해주었던 고마운 존재다.

▲농가의 소득원이기도 했던 누에치던 모습으로 누에에게 어린 뽕잎을 주고 있는 젊은 시절의 김분남 (사진제공: 김분남)

장은 아낙네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농촌의 아낙네로 살아온 막실 할머니들에게는 너나할 것 없이 장에 대한 기억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김분남 할머니에게 장의 의미는 남다르다. 변변한 국밥 한 번 안 사먹고 억척을 떨어 돈을 모아서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아침 7시 기차 타고 가서 팔고 3시 차로 돌아와 밥 한 술 뜨고 다음 날 팔 나물을 장만했다. 젊어 공사판에서 몸을 다친 아저씨는 집에서 농사를 짓고 김분남은 그걸 부지런히 내다 팔며 살림을 일궜다.

“내가 나물보따리 이고 가는 게 힘들다고 보따리가 크면 우리 아저씨가 아침에 지게에 지고 역까지 실어주는데 몸이 불편하다보니 걸음이 느려 기차 놓치겠다 싶으면 내가 받아서 이고 뛰는 게 더 빨랐어.”

그렇게 쌈짓돈을 모아 목돈을 만들고 남편하고 열심히 농사짓는 한편으로 길쌈하고 뽕나무를 심어 부지런히 누에도 쳤다. 아이들이 자라고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땅을 한 평씩 사서 늘리고 그렇게 살아왔다. 젊어 고생은 했지만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 다 엄마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참지 말고 아끼지 말고 살라고 하니 이만하면 잘살았다 싶다.

딸도 키워 시집보내고 아들 키워 며느리도 본 막실 할머니들은 자식들도 귀하고 손주들도 이쁘지만 그래도 자식 집에 가 있는 거 보다 막실 와서 경로당 할머니들이랑 모여 사는 게 좋다고 한다.

평생을 인동 장씨 집안 며느리들로 부대끼며 살아오면서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마는 이제는 오십 년 육십 년을 함께 해온 처지라 더 숨길 것도 없고 때로 자식들보다 더 힘이 되는 동네 할망구들이랑 자식들 눈치 보지 말고 모여 재밌게 지내고 더 늙기 전에 놀러도 가고 맛있는 것도 하나라도 더 찾아먹자고 마음을 맞췄단다. 놀러가기 위해 계도 모으고 무슨 날이면 한 턱 내기도 하고 회비도 걷고 하는데 막실에서는 칠순이나 팔순이면 생일 해 먹은 나이 먹은 만큼 돈을 더 낸다고 한다. 일이 있을 때는 큰집 작은집 어른 따지고 종숙모니 질부니 형님 아우 서열을 따지지만 어울려 놀 때는 서로 재미지게 사는 막실 경로당 할머니들이야말로 지혜가 넘치는 분들이다.

▲남은 인생 재미지게 살다가기로 한 막실 할머니들의 즐거운 한때. 오른쪽이 김분남, 그 옆이 절친 전순화 할머니다. (사진제공: 김분남)

들방잔등 소나무가 지키는 들미고개

▲들방잔등 소나무(방등소나무라)에서 내려다본 들미고개 전경. 빨간지붕 건물이 혼자된 다섯 할머니들이 모여 거주하는 들미고개 경로당이다.

막실과 도로와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엇비슷하게 멀찍이 마주보고 있는 들미고개는 마을이 들 안쪽에 깊숙이 숨어 있어 큰길에서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매고서야 찾았다. 감천면으로 이어지는 길가 대맥정미소에서 큰 도로를 벗어나 들판 가운데로 난 농로를 따라 들어간 곳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차를 세우고 내리니 들미고개 경로당이다. 경로당 앞마당에는 미리 온 차들이 서 있고 수돗가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차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고개를 내민다. 마을 이야기를 듣고 싶어 왔다고 하니 마침 잘 왔다며 대뜸 손을 잡아끌다시피 하며 경로당 안으로 들어가 한 장의 사진 앞으로 데려간다. 주말이라 시간을 내어 모친을 찾아온 김에 경로당 청소도 하고 저녁도 만들어 먹고 간다는 김창원 김복순 남매다. 사진 두 장이 액자에 걸려 있는데 하나는 마을 사진이고 하나는 소나무 사진이다.

▲사라호 태풍으로 무너진 마을의 집을 다시 지은 후의 들미고개 (사진제공: 김창원)

“이 사진이 내가 찍은 우리 마을 사진인데 태풍 난 뒤에 새로 집 지었을 때지요. 지붕에 고추 널어놓은 거도 보이지요. 이게 주민등록 제도가 시작할 무렵인데, 사라호 태풍 지나고 난 뒤래요. 그때 카메라를 빌려 찍었는데 사진관에서 빌린 게 아니고 동네사람들 주민등록 사진 찍는다고 마을에 사진사가 왔는데 내가 그걸 빌려서 우리마을 사진을 찍은 거래요. 그리고 소나무는 저기 보이는 들방잔등 소나무라고 정이품송보다 인물이 더 나아. 동제 지내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예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단오 때면 그네 매어 뛰고 그러는 우리 동네 나무지.”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창원씨는 나중에 취직을 하고 월급을 탄 돈으로 코니카 카메라를 샀고 그걸로 식구들 하고 동네 사람들 사진을 많이 찍었다고 한다. 영주 집에 있어 그 사진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모친 김봉식 할머니가 옛날 앨범 속에 동네 어른들이 찍힌 사진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1950년생 김창원과 두 살 적은 이화자의 결혼기념사진 (사진제공: 김창원)

오빠 김창원은 1950년 3월생으로 6.25가 발발하던 해에 태어나 올해 68세다.

“내가 감천중학교 3학년 때 어등역이 생기고 기차가 개통했고요. 초등학교는 여기는 전부 옥천초등, 중학교는 대부분 감천 다니고 더러 예천이나 영주 다니고 고등학교부터 밖으로들 나갔지. 감천고등학교는 늦게 생겨서 막내 여동생 혜순이가 감천고등학교를 나왔지 싶어요.”

기차역이 생겼을 때 옥천초등학교 3학년이었다는 복순씨는 문제의 들방잔등 소나무를 가리키며 소나무에 그네를 매어 놨다고 해서 왔는데 그새 떼버리고 없다고 성화다.

“왜 벌써 그네를 치웠느냐고 오빠는. 모처럼 그네 탈까 하고 왔는데 사람들 와서 타게 그냥 두지 벌써 없네.”

“그네를 매기는 점동이하고 나하고 이 친구 (김성동)하고 서이(셋이) 멨지. 그네밧줄이 햇볕 보고 비 맞으면 삮는다고 그래 치웠지.”

들방잔등 소나무에 해마다 그네를 매는데, 올해는 세무사를 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는 마을에서 제일 젊은 집안 동생 점동씨도 손을 보태 같이 그네를 맸다. 점동씨가 들어와 있으니 아무래도 더 마음이 든든하다.

창원씨 내외와 복순씨 말고도 창원씨 단짝친구인 김성동 박분순 부부도 함께 왔는데 복순씨가 사진 구경을 하는 분숙씨네 집을 마을 사진 속에서 가리킨다.

“저기 앉아 있는 언니가 사진 속 이 집서 태어났어. 우리 집 건너 요기 요 집은 저기 앉아 있는 아지매집. 아지매 이름은 박분숙이고 나락가리 있는 집이 우리 집. 그날이 타작하는 날이야. 짚더미 꺼내는 게 보이네, 와롱와롱 하는 기계로 그때 타작했거든. 그게 아직 우리 집에 있어.”

남인 우리 눈에는 그저 오래된 동네 사진인데 복순씨 눈에는 타작하는 기계는 물론이고 그날 사람들 움직임도 보이는 모양이다. 수십 번도 더 들여다보며 사진 속 동네 집집마다의 사연을 풀어내곤 했을 것이다.

▲조상 묘소를 찾은 들미고개 어르신들 (사진제공: 김창원)

창원씨 모친 김봉식은 올해 91세로 열다섯에 시집을 왔다.

“열다섯에 왔지. 언나가 시집을 왔어. 어른들이 가라 그러니까 왔지.”

“옛날 우리 외할매가 딸만 다섯 났어요. 엄마가 첫딸이고 그 아래로 내리 딸이 넷이 더 났어. 영주 사는 이모가 이름이 끝분이래, 근데 그 밑에 또 딸이래. 그런데 열다섯에 시집와서 우리 엄마가 우리 8남매를 낳았어요.”

태풍 지나가고 돌아가며 동네 집을 같이 지었듯이 농사일도 품앗이로 같이 하고 누구 집에 제사 들면 가서 같이 떡 치고 전 굽고 해서 해치우고 마음 맞춰 놀러도 많이 다녔던 의 좋고 정 있게 모여 살던 들미고개 사람들은 집집마다 너나없이 다복해서 아이들을 8남매씩 9남매씩 두었다고 한다.

“우리는 한번 모이면 많애. 동네 아랫대 다 모이면 내가 35대인데 우리 35대만 한 100명 넘을 거야. 집집마다 다들 팔남매씩 다 놓았으니까. 여기 이 친구네도 이 집 시어른들은 구남매, 그 구남매가 밑에 다 팔남매 칠남매씩 또 낳았으니까. 그때는 어른들이 그래도 다 먹고 살고 공부 시키고 그랬으니까. 그때 마을에 철로 일을 한 어른들도 있었는데 90 넘어 다들 돌아가셨어요.”

“아침에 옥천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갈 때 보면 집집마다 학생들이 세 명, 네 명씩 나왔다니까요. 여서 학교까지 한 이삼십 분 걸렸지. 우리 처음 학교 다닐 때는 기차가 안 다녔어. 우리 다닐 때 몇 년을 길 닦고, 철로 깔고 했지. 돌 깔아놓은 길로 다니고 그때 재미있었어.”

▲집안 잔치에 가기 위해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집을 나서는 부친과 조부의 모습 (사진제공: 김창원)

지금 들미고개에 살고 있는 집은 다해서 9가구다. 외지인이 새로 들어온 사람은 없고 어른이 계셔서 돌아온 점동씨 같은 사람이 있고 이 마을은 지금도 옛날 같이 살던 그 집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마을에 어른들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자식들이 돌아가며 신경을 쓴다고 한다.

“지금 경로당에 혼자 사시는 집안 안어른들 다섯 분이 여기서 다 같이 지내셔요. 같이 식사도 하시고 잠도 주무시고, 그러니 우리도 걱정이 덜하지요. 누가 아프셔도 알기 쉽고.”

▲풍기 친정에서 신랑 윤재한과 올린 김채봉 혼인식. (사진제공: 김채봉)

봉식 할머니네 사진을 구경하던 김채봉 할머니가 그새 집에 가서 시집올 때 가져온 오래된 앨범을 들고 왔다. 스무 살에 시집온 할머니가 올해 76세니 햇수로 52년 된 앨범이다. 이거 나오면 남사스러워서 어예노? 하면서도 다 지내고 나니 세월이 금방이라며 젊은 날 그 시절이 그리운지 앨범을 연신 넘기며 빛바랜 흑백사진들을 꺼내 구경을 시켜준다.

▲혼인한 후 친구들과 도담상봉에 뱃놀이 간 사진. 1964년 5월로 가운데 짧게 고대를 한 이가 새댁 김채봉. (사진제공: 김채봉)

▲직지사로 놀러가서 찍은 사진으로 앞줄 오른쪽 첫 번째가 김채봉 (사진제공: 김채봉)

▲친정아버지 김봉대 환갑 사진. 한량이었던 부친은 채봉씨 모친(가운데)과 작은어머니와 함께 환갑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 김채봉)

흑백 사진 속 이제는 없는 동네사람들 이야기며 옛날 추억들을 더듬고 있는데, 평장개 장민철 이장한테도 듣고 창원씨하고 그네도 맸다는 그 김점동씨가 경로당 입구에 들어서서 인사를 한다. 손님이 오셨다는데 일하느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여기 형님이 나보다 더 잘 아시니까 저 형님한테 들으시면 될 거라며 일이 덜 끝난 듯 토마토를 따던 바구니를 든 채로 되돌아나간다. 오늘 창원씨 남매가 안 왔으면 점동씨한테 이야기를 들을 참이었는데 일이 바쁜 점동씨가 대신 인사를 챙기러 와준 것이었다. 그저 인사를 나눈 것뿐이었는데 사람 사는 정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복순씨는 옆에서 이야기를 거드는 가 싶더니 어느새 토마토도 따서 어머니들 먹을 거 따로 챙겨드리고 자신들이 가져갈 것도 집집이 나눈다. 개장국도 한 솥 끓이고 저녁거리 겸 어머니들 먹을 반찬거리도 온 김에 장만해 놓는 눈치다. 다섯 어머니들이 모여 지내는 데다 자식들이 제각각 오기도 하고 한꺼번에 들이닥치기도 하고 아무튼 사람이 모이니 웃음소리가 들리고 경로당은 물론이고 온 마을이 분주하다. 다들 한 집안처럼 지내는 데다 다 해서 아홉 가구가 다 인척이니 내 집 식구만 챙기지 않고 누구라도 오면 어르신들을 두루두루 챙겨드린다.

김봉식 할머니가 최고 어른인가 싶었는데 방안에 앉아 있는 안필순 할머니가 100세로 자신하고는 육촌동서 간으로 가장 어른이란다. 봉식 할머니는 열다섯에 와서 75년째 살고 있고 필순 할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을 왔으니 들미고개서 84년을 살았다. 그 세월을 어떻게 다 살아내셨는가 생각하니 아득하다. 8남매 장남인 창원씨가 구순이 넘은 어머니를 한 번이라도 더 보러 틈만 나면 들미고개로 오는 마음을 알 것만 같다.

“여기는 다 그래 해요. 객지에 나갔던 사람들 올 때는 뭐라도 사 들여놓고 가고.”

“만 날 천 날 뭐를 사 주고 가노?”

“바쁘잖으면 밥 잣숫고 가~.”

“시간 안 되면 토마토 간 거 이거라도 잡숫고 가요.”

사람 사는 정이 그게 아니라고 한 잔 더 주시는 것까지 토마토 두 잔을 얻어먹고 나서는데 다시 오라는 어른들 소리가 뒤따라 나온다. 같이 살던 이웃들 숫자는 줄어도 여전히 인정 넘치게 살아가는 들미고개 사람들이다.

▲20여년 전 들미고개 창원씨네 집 앞에서 찍은 마을사람들 사진으로 이중 많은 분들이 고인이 되었다. (사진제공: 김창원)

어등역에서 경북선 기차길 따라 시작된 여정은 어등경로당과 교회와 철도관사와 이발관을 지나 양조장 앞에서 목을 축이고 독죽의 최춘택 정미소를 돌아 철도건널목을 건너 진양 앙고개의 열부비 앞에 멈춰 잠시 숨을 골랐다가 사라호 태풍이 지나간 평장개와 산중 막실에서 인동 장씨들의 장구한 세월을 만나고 들안 웅숭깊은 골짜기에서 다복하게 삶을 일궈온 들미고개 사람들과 들방잔등 소나무 앞에서 끝이 났다.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옥개천 따라 독양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삶도 여울지고 굽이치고 다시 흘러 돌아나가며 이어져왔고 철길은 아버지 어머니들의 땀과 눈물과 웃음을 싣고 달렸다. 고단했으나 잘 살아왔으니 남은 생도 재미나게 살다가자고 웃는 할배 할매들이 있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지금 독양리에 살고 있다. 끝없이 뻗은 선로 위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다가 길게 꼬리를 감추며 달아나는 기차를 만나고 싶은 이들이라면 한번쯤 어등역으로 자신만의 근대기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안동시 공동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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